1_룻기서론 (Introduction to 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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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 부르는 룻의 노래 5 룻기 서론 룻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간결하고 완성도 높은 문학성을 보여주는 책이며,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가 다윗왕가의 내력을 내러티브 형식으로 설명하는 역사문학 (historical literature)해당합니다 (Smith 1995). 근대의 비평주의 신학자들은 룻기를 포로기의 경험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백성들을 위해서 허구적으로 기록된 후포로기 문학(postexilic literature)이라고 주장해온 반면,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룻기가 포로기 이전(preexilic)역사적 저작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Nielsen 1997, 29). 진영의 학자들 공히 룻기가 다윗왕가의 혈통을 확립하거나, 적어도 설명하기 위한 왕정문학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1 1 왕정문학을 강조하는 비평학자들은 포로기 이후저작설을 근거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왕가의 이야기를 통해서 룻기의 저자가 다문화 가정의 문제에 답을 주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룻기를 역사적 해석물로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진영에서 룻기의 저자는 유대교 전통에 따라서 선지자 사무엘이라고 인정되고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어 왕으로 세우고, 이스라엘의 초대왕조와 깊은 관련을 맺은 사무엘이 다윗 가문의 이야기를 기록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여성 학자인 세컨펠드는 룻기의 기록이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여성의 관점으로 쓰여졌고,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된 것을 근거로 구전을 전승했던 여성 이야기 전달자(women storyteller)들의 저작설을 조심스럽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Sakenfeld 1999, 5). 하지만, 문학작품의 관점은 등장인물의 관점을 중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여성중심의 문학작품이라고 해서 여성이 저자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볼때 남성문화권에도 여성중심의 관점의 문화가 존재하며, 여성문화권에도 남성중심의 문화적인 형태가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룻기를 여성전승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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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 부르는 룻의����������� ������������������  노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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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  서론����������� ������������������  

룻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간결하고 완성도 높은 문학성을 보여주는

책이며,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가 된 다윗왕가의 내력을 내러티브 형식으로 설명하는

역사문학 (historical literature)에 해당합니다 (Smith 1995). 근대의 비평주의 신학자들은

룻기를 포로기의 경험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백성들을 위해서 허구적으로 기록된

후포로기 문학(postexilic literature)이라고 주장해온 반면,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룻기가 포로기 이전(preexilic)의 역사적 저작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Nielsen

1997, 29). 양 진영의 학자들 공히 룻기가 다윗왕가의 혈통을 확립하거나, 적어도

설명하기 위한 왕정문학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습니다.1

1왕정문학을 강조하는 비평학자들은 포로기 이후저작설을 근거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왕가의 이야기를 통해서 룻기의 저자가 다문화 가정의 문제에 답을 주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룻기를 역사적 해석물로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진영에서 룻기의 저자는 유대교 전통에 따라서 선지자 사무엘이라고 인정되고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어 왕으로 세우고, 이스라엘의 초대왕조와 깊은 관련을 맺은 사무엘이 다윗 가문의 이야기를 기록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여성 학자인 세컨펠드는 룻기의 기록이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여성의 관점으로 쓰여졌고,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된 것을 근거로 구전을 전승했던 여성 이야기 전달자(women storyteller)들의 저작설을 조심스럽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Sakenfeld 1999, 5). 하지만, 문학작품의 관점은 등장인물의 관점을 중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여성중심의 문학작품이라고 해서 여성이 저자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볼때 남성문화권에도 여성중심의 관점의 문화가 존재하며, 여성문화권에도 남성중심의 문화적인 형태가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룻기를 여성전승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선교사가 부르는 룻의����������� ������������������  노래 6

룻기는 다윗 왕가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는 왕정문학이지만, 그 이상의

사회적, 신학적, 영적 의미를 전달해 주는 성경이기도 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룻기의

저작배경에 나오미 이야기, 룻의 이야기 등과 같은 다양한 구전 내러티브가 있었다고

전제하면서 각 이야기의 메시지가 하나의 내러티브로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학자인 에드워드 캠벨 (Edward F. Campbell Jr.)은 룻기를 히브리 단편문학(Hebrew

short story)으로 구분했습니다. 그 주장의 배경에는 두 가지 학문적인 가설이 있는데

첫째로 어떤 학자들은 “복수의 이야기가 간결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된

문학소설(Novelle)”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다양한 독립적인 이야기들이 구전

전승자들에 의해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면서 몇개의 이야기가 만나 하나의 문학적인

형식으로 통합되면서 오늘날의 룻기가 완성되었다는 견해입니다. 둘째로 어떤

학자들은 룻기의 이야기가 본래 단순한 운문에서 점차 이야기를 서술해 가는 “예술적

산문 (Kunstprosa)”의 형식으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Campbell 1975, 3–5). 룻기의

히브리어 원문은 문학적 미(美)를 머금고 있는 “운문적 산문”(poetic prose)으로

저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다윗 왕가의 배경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율법을 풀어 이야기체로 설명하는 어떤

면에서 신학적인 의도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입니다.

비평신학자인 독일 신학자인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과 같은

학자는 룻기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룻기는 “아름다운 운문문학으로 보아야지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Gunkel

1913, 88–89). 하지만, 블란서 학자인 라꼬뀌(Andre LaCocque)는 룻기의 문장들은

문학작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룻기의 첫 문장인 “사사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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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리하던 때에”라는 기록과 다윗 왕가의 족보를 배경으로 룻기의 정경성과 역사성이

인정되어야 하며, 룻기의 궁극적인 의미는 이스라엘 왕조가 율법을 집행하기 이전인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내용과 정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행했는지

독자들에게 이해하도록 돕는 “율법의 주석 (commentary of the Law)”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LaCocque 2004, 18–19).2

룻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야 할 율법의 중요한 정신을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문학장르의 형식으로 설명해 주는 사실적 내러티브입니다. 또한 룻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를 망라하여 유다공동체에 던지는

다양한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룻기에 함축되어 있는 이러한 의미는

일차적으로 히브리 독자들에게 교훈을 줄 뿐 아니라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다양한

영적인 도전과 실제적인 삶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역사의����������� ������������������  주인이신����������� ������������������  하나님!����������� ������������������  ����������� ������������������  

룻기의 역사성에 대한 신학자들의 논란이 있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룻기의 역사적 위치는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 입니다 (룻 1:1). 그래서 룻기는 구약성경의 사사기 다음에

위치합니다.

2데렉 베티(Derek R.G. Beattie)는 룻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법적인 관행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바 있으며 (Beattie 1974), 데이비스는 룻기의 기록은 구약 율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고엘의 법적인 규정과 이스라엘의 풍습을 알 수 있는 책이라고 지적한다 (Davies 1983). 룻기는 율법의 내용과 정신에 생명력을 부어 넣어주어 독자들의 삶을 율법의 정신에 반추할 수 있는 역사적인 히브리 문학이다.

선교사가 부르는 룻의����������� ������������������  노래 8

하지만 본래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 성경에서 룻기는 지혜서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순서도 잠언 뒤에 위치합니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어떤 학자들은 구약성경의 룻기가 실제로는 나오미의 전승, 룻의 이야기가 포로기

이후에 합쳐지면서 편집된 유대문학의 한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룻기라는 책의 의미가 역사적인 진정성에 있다기 보다는 후대에 편집된

문학작품으로 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문서비평적 방법으로 성경의 편집과정을 설명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은 신학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만약

룻기의 이야기가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라면, 다윗 가문의 족보도 날조된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역사도, 메시야의 혈통도 진정성이 없는 종교적인 문학 작품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룻기는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거주하던 유다 지파의 한 가정이 모압 땅에

이주함으로 겪게 된 고난과 축복의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고난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한 나오미와 룻에게 어떠한 축복이

임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 허락하신 축복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과 온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이중축복으로 펼쳐졌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룻기는 배타적인 선민의식으로 무장되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인들을 향해서 어떻게 성취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메시야의 가문을 보여줄뿐 아니라 보아스라고 하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깊은

묵상가운데 룻기를 읽게 되면 개인과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 뿐만 아니라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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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참된 복음의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룻기가����������� ������������������  제시하는����������� ������������������  관점들

룻기는 성경에서 가장 재미 있는 이야기 책 중의 한 권입니다. 율법아래

저주받은 이방 땅 모압의 여인이 (신 23:3; 느 13:1) 유력한 유다 지파의 그것도 부유한

에브랏 (베들레헴의 옛이름) 지방 출신인 유대인 가정에 시집을 오게 됩니다.

이것만으로도 현대판 드라마를 쓸만한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흉년 중에

결혼한 유복한 남편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룻은 척박하고 궁핍한

고난의 삶 가운데서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시모(媤母)와 하나님을 선택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그리고 결국 시모와

함께 유다로 돌아온 룻은 남편 가문의 ‘기업무를 자’인 부유한 보아스와 재혼해서

나오미를 돌보고 아들을 낳아 다윗 왕가를 이루게 되는 반전(反轉)이 있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이 룻기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세상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전체를 보는 세 가지의

독특한 관점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선교적인����������� ������������������  관점����������� ������������������  ����������� ������������������  

첫번째 관점은 바로 선교적인 관점입니다. 영국의 지성이라 불리는 존

선교사가 부르는 룻의����������� ������������������  노래 10

스토트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The Living God is a Missionary

God)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Stott 1999, 3–9). 크리크토퍼 라이트는 이것이 성경전체를

보는 관점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후 세상을 회복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가운데 일하셨습니다. 성경은 바로 역사가운데

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학자인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선교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성경해석을 선교적인

토대위에 확립해야 할 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Wright 2006, 48–69). 룻기의

이야기는 한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개인과 가정의 드라마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축복과 더 나아가 인류를 향해서 펼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해 가는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그런 점에서 볼때 룻기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적 관점을 독자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모압여인 룻의 이야기는 심각한 해석학적인

어려움을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모압과����������� ������������������  암몬의����������� ������������������  자손들은����������� ������������������  

영원히����������� ������������������  하나님의����������� ������������������  총회에����������� ������������������  들어오지����������� ������������������  못하리라”(신 23:3)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압여인을 이스라엘

역사에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또한 신명기 7:3에 보면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인간의 수 많은 죄를 기록하고

있지만, 불운한 가정이 율법을 무시하고 모압여인을 이스라엘의 역사안으로 끌어들인

사건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모압 여인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그것도 왕가인 다윗의

가문에 편입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사실 율법에 비추어서 볼때 룻의 이야기를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해했으며 유대교의 랍비들은 어떤한 대답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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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았는지 궁금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교의 랍비들은 룻의 이야기를 유대교 ‘회심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랍비 요셉 텔루슈킨은 룻의 고백이 “시모 나오미를 향한

효와 충절의 고백일뿐 아니라, 나오미의 백성과 그 하나님을 향한 회심의 결단”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룻의 이야기에 대한 랍비들의 전통에 기초해서 “회심이란 곧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버리고 유대인으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며, 과거의 신앙을

버리고 유대인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Telushkin 2010, 359).

이방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순간 혈통과 인종에 대한 법적인 변화가 생겨서

모압여인 룻은 더 이상 모압사람이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역사적으로 정립된

전통이기는 하지만 율법에 목숨을 걸고 살았던 룻기 당시의 유대인들이 어떻게

율법으로 저주를 받았던 모압 여인의 회심을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단서를 제공할만한 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유대인들은

저주받은 이방 여인의 회심을 수용할만한 선교적인 관점을 갖지 못했을 것이며, 룻의

이야기는 이방인의 회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갖도록 해

주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적어도 어린 시절부터 룻의 이야기를 들어온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선교적인 의도를 수용했을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을

해석하는 율법학자들 역시 수용적인 관점을 발전시켜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룻기는 선민과 이방인을 구분하던 배타적인 담을 허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룻의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우리’라고 하는 내부공동체와 ‘다른’ 사람들이 위치한 외부인을 구분하는 다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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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챤,” “성도,” “불신자”와 같은 표현의

이면에 숨겨진 배타성 외에도 다양한 직분으로 사람들의 신앙에 등급을 매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을 통해서 오늘날 성도들은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교적인 열정과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부르신

하나님의 선교적인 소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유대교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모압여인 룻의 회심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는지? 룻기에 나타난 “회심의 메카니즘”이 과연 성경 전체를

통해서 작용하고 있는지를 규명해서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큰 그림을 보는 선교적인

관점을 가져야 겠습니다.

나그네의����������� ������������������  관점����������� ������������������  ����������� ������������������  

룻기가 던져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다는 메시지 입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유대지파

사람이었던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주한 사건으로

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는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그 시모

나오미를 쫓아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해 오면서 새로운 나그네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것

입니다. 사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을 살펴보면 때로는 자발적인 혹은 비자발적인

이주를 통해서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나그네의 삶이라는

깨달음은 인생에 일어나는 고난과 축복을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해 줍니다.

선교사가 부르는 룻의����������� ������������������  노래 13

무엇보다 아담의 타락이후에 영원을 잃어 버린 인류의 영적인 실존에 관한 눈을 띄어

줍니다.

한 역사신학자는 “성경이 인간의 이주역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단언합니다 (Norwood 1969, 21).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놋 땅으로 이주한 이래,

노아의 홍수이주,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 요셉과 야곱가정의 애굽 이주와 출애굽,

바벨론 포로생활과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모든 기록이 바로 인간의 이주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레드릭

놀우드(Frederick A. Norwood)는 인간은 어느 곳으로 이주했든지 새로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비로서 “궁극적인 피난처요, 최종적인 고향인” (the final refuge,

the final home) 하나님을 발견했다고 단언합니다 (1969, 22). 인간은 이주를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인생에 불어오는

불가항력적인 고통 때문입니다. 고난중에 인간 자신의 무력함을 경험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그네의 관점은 인생에 점철된 고난을

새롭게 이해하고 고통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영적인 관점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계 여러 지역의 한인교회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곳 저곳의 이민교회를 방문하면서 ‘나는 한국에서는 절대 교회 나가거나

신앙을 갖게 될 수 없는 삶을 살았는데, 이민생활중에 고통을 당하면서 절대자의

도움을 찾아 교회에 나가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간증을 흔하게 들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주를 통해서 나그네의 삶을 살게 하신 것은

구원역사를 펼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요 방법이었습니다. 구원역사의 새

선교사가 부르는 룻의����������� ������������������  노래 14

장을 열기 위해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가나안 이주를 통해서 였으며,

요셉을 통해서 야곱의 가정을 흉년에서 구원하신 것도 애굽 이주를 통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서 출애굽을 통해서 가나안 이주 길을 가게 하셨으며,

타락해 가는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단련하시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바벨론 포로

이주를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바울과 같은 이주민을

세우셨으며, 복음이 헬라 문명권에 힘있게 확장되게 하시기 위해서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유대의 이주민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나그네들을 통해서 잃어

버린 열방을 구원하십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세상의 나그네로 살게 됩니다.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나그네’라는 이 정체성을 잃어 버리는 순간 세상에 속한 자가

되어 버립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나는 평생을 한 지역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데 어떻게 이주민의 정체성, 나그네의 영성을 가질 수 있을까? 라고 자문할 수

있습니다. 룻기를 읽으면서 나그네의 삶이 의미하는 영적인 교훈이 무엇인지?

이민자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정치적으로 한 곳에 머물러 정착해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나그네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가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지 곰곰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나그네의 공동체인 교회의 존재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공동체적����������� ������������������  관점����������� ������������������  ����������� ������������������  

룻기가 제공해 주는 또하나의 관점은 바로 공동체에 관한 관점입니다.

선교사가 부르는 룻의����������� ������������������  노래 15

공동체적 관점은 우리 자신과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룻기와 같이 짧으면서도 ‘이방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흥미로운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요나서 입니다. 요나서는 이방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이 한 개인의 순종이라는 측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룻기에는 이방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류의 구원계획이 한 가정과 확대된

공동체의 이야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 룻의 이름으로 기록된 이 성경은

그를 둘러싼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족들, 친족의 책임을 지고 있는 보아스의 결정과

그를 통해 이어지는 혈통적인 가계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벳의 출생후에

기록된 모든 백성들과 장로들의 축복이나 여인들의 찬송시를 보면 모든 유대 공동체가

율법을 뛰어 넘어 이방여인 룻을 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

하나라도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지 않았다면 룻기가 전하고자 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성경의 역사에 기록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이주하지 않았다면? 나오미가 모압여인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맞지 않았다면? 말론과 기룐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나오미가 유대 땅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룻이 보아스의 추수 밭에서 이삭을 줍지

않았다면? 보아스가 이삭줍는 수 많은 부녀중에 뭍혀 있는 룻을 지나치고 말았다면?

부유한 보아스가 가난한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지 않았다면? 어느 한 가지의 이야기가

바뀌어도 룻기는 의도한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없는 사뭇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룻을 둘러싼 엘리멜렉의 가정과 보아스의 가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보는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사가 부르는 룻의����������� ������������������  노래 16

성도와����������� ������������������  교회를����������� ������������������  보는����������� ������������������  관점����������� ������������������  

룻기를 통해서 배우는 선교적, 나그네적, 공동체적 관점을 통해서

오늘날의 성도는 자신과 교회공동체를 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관점이 우리 자신의 삶에 나타나고 교회를 통해서 구현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이나 세계의 한인들이 살아가는 어느 곳이든지 다양한 민족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원인으로 이주하여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배타적인 선민주의의 담장속에 갇혀 이웃에 살아가는 타민족의 필요와

고통을 선교적으로 돌아보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기업무를 자’의 사회적이고

영적인 책임을 저버린 사람들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선교적인 삶을 사는 공동체는

교회의 모든 사역과 관심이 교회담장을 넘어 지역사회와 세계를 향하게 됩니다. 룻기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불편하고, 미워하고, 대적했던 모압사람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동일하게 오늘날 우리 삶속에 그런 불편한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 도전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의 관점은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거주민과 다른 삶의 태도와 목적을 갖게 해 줍니다. 해외 이민자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나그네의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이민자로

타민족 가운데 거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의 모든 관심과 열정은 본국을

향해 있습니다. 아픔과 상처로 본국을 떠나왔다 할찌라도 고향과 가정, 가족들을 향한

마음은 동일할 것입니다. 동일하게 본국에 거주하는 성도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선교사가 부르는 룻의����������� ������������������  노래 17

관점을 가지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이 영적인 나그네의 자리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바른 목적을 가진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들이, 형제자매와 모든 일가친척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가족에 대한 책임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 역시 영적인 한 가족으로 동일한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맡겨진 역할과 섬기는 모습은 다를지 모르지만, 모두가 부르신

이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 섬기며 도와야

합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갈

때 복음증거를 통한 영혼구원과 하나님의 정의구현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주님의 때가 도래하게 되는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심 받은

가족 공동체, 교회 공동체의 배후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일을 당하든지, 어떤 사람을 대면하든지 배후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공동체적 관점을 회복하고 강화시키는 것이야 말로

남아 있는 선교과업을 성취하는데 매우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문화가 기독교 공동체 안에 침투하고, 신학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로는 가족과 관계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10/40 창 안의 미전도종족 그룹에 복음을

전하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이슬람권은 가족과 공동체의 가치로 서구의 개인적인

복음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룻기를 통해서 성경

전체를 보는 공동체적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개인구원뿐만 아니라

선교사가 부르는 룻의����������� ������������������  노래 18

“주����������� ������������������  예수를����������� ������������������  믿으라����������� ������������������  그리하면����������� ������������������  너와����������� ������������������  네����������� ������������������  집이����������� ������������������  구원을����������� ������������������  얻으리라”(행 16:31)는 말씀대로 가정을 구원하고, 공동체를

구원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