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시편의 복음과 상황-포럼강의용[1].hwp - 고려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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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복음과 상황-시편 1,2편을 중심으로김성수(고려신학대학원, 구약학)

1. 들어가는 말 시편 1,2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 배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에서,

시편을 수집하고 편집한 사람이 시편 전체의 서문으로 시편 1편을 제일 앞에 배치했다고 보았다.1) 시편 1,2편이 시편의 서론이라면 시편 전체의 내용들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주제들과 용어들을 소개하기 때문에 이 두 시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시편 전체의 교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일 것이다.

그래서 본고는 시편 1,2편이 어떻게 서론으로서 시편 전체의 주제들을 다루고 안내하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필 것이다. 특별히 이 연구는 시편의 복음과 상황이라는 제목 하에서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1,2편이 시편의 기자들이나 독자들이 처한 현실적 어려움을 잘 보여주면서도, 그들이 견지해야할 종말론적인 희망을 여러 주제들을 통해서 잘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시 1,2편을 통한 시편의 상황과 복음에 대한 이해는 시편을 어떻게 예수님의 사역과 현재의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올바른 길을 열어줄 것이다.

2. 서론으로서 시편 1,2편이 갖는 관련성시편 1,2편이 서론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이 두 시편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관련성들 때문이

다. 시편 1,2편은 언뜻 보기에는 전혀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 공통점들로 연결되어 있다.

가. 어휘적 관련성1) 이 두 시편은 대부분 다윗의 시편들로 구성된 시편 제 1권에서 표제가 없는 몇 안 되는

시편들이다. 표제가 없는 시편들인 10편과 33편은 사실상 각각 9편과 32편의 연속이라는 면에서 표제를 가진 것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시편에만 표제가 없는 것은 이 두 시편이 시편의 최종적 배열에서 의도적으로 서론적 기능을 하도록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2) 가장 두드러진 공통 어휘는 축복을 선언하는 감탄사인 “복이 있도다!”(yrev.a;) 혹은 “얼마나 행복한가!”이다. 이 감탄사는 1편의 첫 번째 절과 2편의 마지막 절에 나타남으로써 마치 두 시편을 감싸는 틀인 것처럼 보인다. 이 어구는 시편 전체를 해석하는 중요한 주제어인 것이 분명하다. 이런 배치는 시편 1,2편이 모든 시편을 복된 삶에 대한 안내로 읽도록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1편이 제시하는 ‘여호와의 율법을 기뻐하고 그것을 묵상함’과 2편이 제시하는 ‘여호와(혹은 왕)께 피함’을 행복의 길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3) 다음으로 중요한 공통 어휘는 1편 2절에서 “묵상하다”로 번역되고 있고, 2편 1절에서 “(음모를) 꾸미다”로 번역되고 있는 동사 hgh이다. 이 동사는 의성어로서 중얼거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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읊조림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모습과 음모를 꾸미기 위해서 중얼거리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해서 그의 가르침을 묵상하는 자와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기 위해서 일을 꾸미는 자들의 모습을 이 공통된 동사는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4) 또 명사 “길”과 동사 “망하다”가 함께 반복된다. 1편 6절(“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과 2편 12절(“너희가 길에서 망할 것이다”)의 표현 방법은 매우 유사하다. 더군다나 이 표현은 둘 다 각 시편의 마지막 절에서 일종의 결론처럼 등장한다. 그래서 1편의 ‘악인들’과 2편의 열방의 ‘통치자들’을 일치시키면서 ‘악인들은 결국 망한다.’는 1,2편의 공통 주제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한편 1편은 1절의 ‘죄인들의 길’과 6절의 ‘악인들의 길’이라는 표현으로 수미쌍관을 이루면서 이들의 멸망하는 운명을 번성하는 의인의 길과 대조시킨다. 이 표현들은 1:5의 여호와의 심판과 2:5,12의 여호와의 진노의 심판의 주제들을 부각시킨다.

5) 다음으로 눈에 띄는 어휘들이 있다면 1편 2절의 ‘율법’ 혹은 ‘교훈’으로 번역되는 hr"AT와, 2편 7절의 ‘율례’ 혹은 ‘칙령’으로 번역되는 qxo이다. 이 단어들은 둘 다 다른 본문들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특별히 이런 현상은 시 119편에서 두드러진다. 1편이 의인의 묵상과 기쁨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여호와의 교훈을 제시한다면, 2편은 인간 왕이 의존하는 왕권의 근거와 약속으로서 여호와의 ‘조서’ 혹은 ‘다윗 언약’(사무엘하 7장)을 제시한다. 이 단어들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단어들은 1:2의 ‘즐거움’과 2:11의 ‘기뻐하다’이다. 여호와의 교훈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기뻐하는 것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다.

6) 또 지혜와 관련된 어휘들이 두 시편을 연결한다. 1편에 등장하는 ‘악인,’ ‘죄인,’ ‘꾀,’ ‘의인,’ ‘교훈’ 등의 어휘들과 1편 전체의 논조는 지극히 지혜 문학적이다. 그래서 주석들은 1편을 토라 시편 혹은 지혜 시편으로 규정하고 있다. 2편은 물론 제왕시편으로 주로 분류되지만 10절은 분명하게 지혜 문학적인 어휘들을 보여준다. “지혜롭게 하다”와 “훈계를 받다”가 그 예들이다. 이러한 어휘들은 “복되도다”와 함께 잠언과 같은 지혜서들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로 두 시편의 교훈적인 논조를 반영하면서 서론적인 특징들을 강화한다. 1~2절의 교훈적인 질문들도 10절의 훈계와 함께 지혜 문학적 특징을 강화한다.

7) 마지막으로 두 시편에 동시에 등장하는 어휘들을 들 수 있다. 1:1의 ‘자리’와 ‘앉다’는 단어는 2:4의 ‘앉다’와 대조를 이룬다. 전자가 악인의 자리에 앉지 않는 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악인들과 멀리 떨어진 거룩한 하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 1:3에서 물가에 심긴 나무가 과실을 ‘맺는’(!tn) 모습은 2:8에서 여호와가 자신이 세운 왕에게 땅 끝을 소유로 ‘주는’(!tn) 모습과 연결된다. 1편의 열매 맺는 의인이 2편에서는 왕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1:1의 ‘오만한 자들’은 ‘조롱하는 자들’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열방을 ‘비웃으시는’ 하늘에 계신 자와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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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주제적 관련성 두 시편은 위의 어휘적 관련성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주제적으로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

다.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의인과 여호와가 세우신 왕의 형통과 악인들의 멸망이다. 즉 두 가지 길에 대한 비교이다. 1:1의 ‘악인들의 꾀’는 2:1~2의 열방의 통치자들의 ‘회의’와 연결되고, 의인이 여호와의 율법을 읊조리는 것(1:2)과 다윗 왕가의 왕이 여호와의 ‘칙령’을 말하는 것(2:7)이 연결되며, 의인의 형통(1:3)은 여호와의 ‘아들’의 승리와 통치의 세계성이나 영원성(2:8~9)과 연결된다. 또한 형통한 의인에 대한 비유인 “시냇가에 심긴 나무”(1:3)는 2편 6절에서 “하나님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운 왕”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2) 또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의인의 행복(1:1; 2:12)은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고 마는 악인들의 파멸(1:5~6; 2:9,12)과 대조를 이룬다. 시편 1편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들의 흩어짐은, 시편 2편에서 통치자들이 여호와가 세운 왕에 의해 깨뜨려지는 것과 평행을 이룬다.3) 또, 시편 1편에서 악인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1:1) 것을 선택한 사람들에 대한 축복은, 시편 2편에서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와 ‘결합하는’ 것(2:12)을 선택한 사람들에 대한 축복에 상응한다.4) 이러한 내용적 관련성은 시편의 서론인 두 시편의 결속력을 강화시켜준다.

다. 시편 1,2편이 안내하는 신학적 강조점시편 1,2편은 도대체 시편을 어떻게 안내하고 있는가? 시편 1,2편은 그 주제 면에서 여호와의

토라에 대한 묵상과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인 왕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인다. 또 1:1, 2:12에 나오는 축복 선언을 중심으로, 1,2편은 복된 삶에 대한 가이드로서 여호와의 말씀 묵상과 그분에 대한 의존이라는 관점으로 시편을 읽게 한다. 한편으로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시편 전체의 주제라면 그것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 방법이 그분의 말씀 묵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Mays는 이런 모든 면들을 아우르면서 한 가지의 중심 주제를 부각시킨다. 그도 시편 1,2편이 전체 시편을 읽는 기준과 틀로서 ‘여호와의 토라’와 ‘여호와의 통치’를 제시한다고 한다.5) 그는 시편 1,2편이 제시하는 여러 주제들 중에서 ‘여호와의 왕권’ 혹은 ‘여호와의 통치’를 시편의 가장 근본적인 주제라고 말하면서,6) 여호와의 통치의 장소는 시온이고 그의 통치를 대표하는 사람은 왕인데 이 ‘시온’과 ‘왕’의 주제도 시편 전체에서 중요한 주제라고 통찰력 있게 제시한다.7)

한편 Mays는 1,2편이 제시하는 문제가 되는 상황을 잘 지적한다. 그것은 여호와의 토라 앞에서도 자신들의 지혜를 따라 사는 개인들과, 여호와의 통치 앞에서도 자신들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는 사회적인 그룹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다. 그 첫 번째 행동에 대한 여호와의 해답이 1편에 있는 자신의 토라이고, 두 번째 그룹들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이 시편 2편에 있는 기름부음 받은 왕이다.8)

메이즈가 위에서 제시한 시편의 시인들이 처한 상황과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붙드는 주제들은 시편 전체를 해석하는 중요한 주제들이자 고난스러운 상황을 넘어서게 하는 복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편의 상황과 복음에 대한 이해는 각 시편들을 설교하고 적용하는데 필수적이다. 이런 이해에 바탕을 두고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 그리고 그분의 교회에 적용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풍성한 교훈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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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편 1,2편이 안내하는 시편의 상황가.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로 가득한 세상(시 1:1)시편 1편 1절은 축복의 감탄사로 시작하지만 부정적인 표현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악인들

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2절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가르침을 주야로 묵상하는” 일의 지난(至難)함을 암시한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모두 복수로 표현된 반면에 복된 ‘사람’은 단수로 표현되어 있다는 문법적 특징은, 마치 의인이 악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칼빈은 이것을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의 불경건과 분리되지 않고서는 말씀 묵상이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9) 시편 119편 22~23절은 “주의 율례들을 묵상하는” 일이 주변 사람들의 비방과 멸시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시편 1,2절의 상황이다.

G. Wilson은 그의 시편 주석 개요에서 3편부터 41편까지의 제목을 “실제 세상의 반대들을 직면함”(Facing Contradictions of the Real World)이라고 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3편 이하의 시편들이 시편 1편의 기자가 말한 ‘악인들’의 극심한 반대에 둘러싸여 있음을 잘 보여준다.10) 실제로 시편 3편부터는 수많은 시편 기자들이 자신들을 압제하는 악인들로 인해서 탄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편 1편의 시인은 소박한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당장 건강과 부와 명예 등을 보장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악인들에 의해서 도리어 의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실제 세상”을 잘 알고 있었다. 악인들은 교만하고 형통하고 건강하며 권세를 부리는데 비해 의인들은 질병의 고통 가운데서 악인들의 위협을 당한다(예: 시 10:1~11).11)

이런 문제들을 가장 잘 다루고 있는 교훈적 시편들이 시 37편과 73편이다. 악인들에 대한 시편 73편 3~9절의 묘사는 정확하게 그런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이 시편이나 다른 시편들이 말하는 악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열려 있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다. 자신들이 자신들에게 ‘법’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 교훈하고, 스스로 인도하고, 스스로 다스린다.”12) 이들은 혼란과 불의와 탐욕과 경쟁과 비방과 온갖 종류의 악을 이 세상과 경건한 자들의 공동체에 만연시킨다(시 55; 84:10; 94; 119).13)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경건한 자들을 짓밟고 압박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를 확장한다(10:2,4,13; 11:2; 14; 36:1 등).14) 악인들은 개인 기도시편들에서 의인들의 대표인 시인의 ‘원수’(시 3:7; 6:10; 7:5; 9:3,6; 13:4; 17:9; 31:8,15; 41:5 등), ‘대적’(시 3:1; 7:6; 13:4; 23:5; 27:2; 31:11 등), ‘행악자’(시 26:5; 27:2 등)로 등장하고, ‘악인들’ 혹은 ‘불경한자들’(시 3:7; 9:17; 10:2이하; 11:2,6; 12:8; 17:9; 26:5 등), ‘핍박자’(시 7:1; 31:15; 35:3), “악을 행하는 자” (시 5:5; 6:8;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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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36:12; 59:2; 92:7,9; 94:4,14; 101:8; 141:4,9)로 불린다. 그들은 거짓과 모함으로 무죄한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26:4), 음모를 꾸미고 모략하는 자들로서 ‘가난한 자들’을 도탄에 빠뜨린다(시 4:4; 35:20). 그들은 ‘사기꾼’ (시 5:6; 12:2; 26:4), ‘거짓말쟁이’(시 4:2; 5:6; 12:2), ‘위증하는 자’(11:5), 자신에게 희생된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교만한 자들(22:6; 35:16; 39:8), 약자를 짓밟는 힘 있는 자들(시 35:10)이다. 그래서 악인들은 자주 ‘적군’(3:6; 27:3; 55:18; 56:1; 59:1-3; 62:3),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이나 낚시꾼(시 7:15; 9:15; 31:4; 35:7-8; 57:6; 59:7; 64:4; 140:5), 들짐승(시 7:2; 22:12-13; 27:2; 35:21; 17:12; 22:21)에 비유된다.15)

한편 의인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시인들’이 죄를 범할 때에는 그들도 시편 1편이 말하는 ‘악인’과 ‘죄인’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1편이 안내하는 문제 되는 또 다른 심각한 ‘상황’은 시인들의 ‘죄’의 문제이다. ‘죄’와 ‘악’은 의인들을 악인들로 바꾸고 여호와의 심판이 대상이 되게 한다. 많은 시편들이 시편 기자들의 죄의 문제와 회개와 용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6, 32, 38, 39, 51, 130, 143 편). 경건한 자의 모델인 다윗조차도 자신의 죄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19:13; 25:7,18; 31:10; 32:3~5; 38:3~4,18; 39:1,8; 40:12; 41:4; 51:1~2).16)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의 존재, 그리고 의인들이 저지르는 죄의 문제는,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복되다는 선언이 그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여전히 복된 길임을 증언하고 독자들을 그렇게 살도록 격려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서, ‘개인’으로 등장하는 시인들, 혹은 그 개인이 대표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처한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도록 하면서도 그 문제들은 반드시 해결될 것이라는 복음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1편의 4~6절은 악인들의 멸망을 종말론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한 ‘악인들’이라는 문제로부터의 구원, 그것이 복음이다.

예수님은 의인의 대표요 참된 의인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많은 악인들에 의해서 고난과 수치와 조롱과 죽음을 당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시편 1편이 말하는 악한 ‘상황’의 가장 대표적인 희생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악인들에 의해서 고통당했던 수많은 시편 기자들의 눈물과 탄식을 완성한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수많은 시편 기자들의 부르짖음의 절정인 셈이다. 악인들에 의해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실제 상황을 예수님의 십자가는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인들에게 조롱과 수치와 고난을 당하는 수많은 성도들의 외침은 시편기자들과 예수님의 ‘상황’에 맞닿아 있다. 그들의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이며, 그들의 탄식은 그리스도인들의 ‘탄식’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말씀과 대조되는 악인들의 길에 의해서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시편은 오늘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애쓰다가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우리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이었고 구약 성도들의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편과 예수님이 제시하는 복음은 그런 고통을 능가하는 복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고 하신다. 여기의 이전 선지자들 안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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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기자들이 포함된다.

나. ‘나라들’과 ‘민족들’과 ‘왕들’과 ‘관원들’이 반역하는 세상(시 2:1~3)시편 1편의 ‘악인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다룬 ‘상황’이었다면, 시편 2편에 등장하는 “분노하는

열방”과 “허사를 경영하는 민족”과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은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상황’을 제시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시 1,2편의 악인들과 열방의 통치자들은 많은 면에서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시편 2편의 통치자들은 시편 1편의 악인들의 확대된 모습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시편 2편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지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다윗 왕가의 새 왕의 즉위식 광경을 연상시키는 것만은 분명하다.17) 이 시편에서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왕은 제국의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고대 근동에서 제국의 왕이 교체되던 시기는 종종 선왕의 통치를 받고 있던 나라들과 민족들에게 반란의 기회로 여겨졌다.18) 그런 의미에서 1~3절은 다윗 왕가의 왕이 교체되는 시기에 가신들이 봉기하는 모습을 가상적으로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1~2절과 10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나라들’과 ‘민족들’과 ‘왕들’과 ‘관원들’이라는 표현은 1편 1절의 ‘악인들’에 대한 용어들처럼 매우 총체적인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또 2절은 이들의 반역이 단지 왕에 대항한 것만이 아니라 “하늘에 좌정하신 분”(4절)이신 여호와에 대항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비록 역사적 배경은 유다 왕조와 관련된 것이지만, 사용된 표현은 마치 땅위의 모든 왕들과 나라들이 시온에 지상 수도를 둔 하나님나라를 대항하여 봉기를 한 것처럼 그린다. 즉 세상 나라와 하나님나라 간의 전쟁으로 무대는 확대되어 있다.19)

이상의 관찰들은 시편 2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단순히 이스라엘 혹은 유다의 한 왕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 확대될 하나님나라의 대리 통치자임을 분명하게 해준다(8~9절). 1편에서 의인과 악인들 사이에 일어났던 싸움은 2편에서는 하나님나라의 왕과 세상 나라들의 통치자들 간의 싸움으로 확대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제왕시편들은 왕을 대항하여 일어나는 세력들을 1,2편에서 사용된 것들과 유사한 용어들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편들에서 그들은 “왕의 원수들”(시 45:5), 왕과 민족의 “원수”(시 18:40; 21:8; 72:9; 110:1,2; 132:18), 왕을 “미워하는 자들”(시 18:40; 21:8; 89:23,42), “대적들”(시 72:9; 89:23,42),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시 18:39,48)로 불린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들’(시 2:8; 18:47; 45:5; 72:11; 144:2)이며, 그들의 왕이나 통치자들(시 2:2,10; 110:5)이다. 그들은 왕이 무찌를 대상(시 2:12; 21:8-9)이다.20)

또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기도 시편들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대적들은 공포와 애도의 대상이요 탄원과 저주의 대상으로, 제왕시편들에서처럼 “원수”(시 44:16; 74:4; 80:6; 106:42), “대적들”(44:7,10; 60:11,12; 74:4,10), “미워하는 자들”(44:7,10), “거만한 자”(123:4), “조롱하고 욕하는 자”(시 44:16; 79:4; 123:4) “보복하는 자”(44:16), “나라들”(79:6)로 불린다. 이 시편들에 의하면,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한편, 여호와의 백성을 정복한 왕국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74:3-4,7; 79:1).

이스라엘의 찬양시들에도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창주주요 민족들의 주님인 여호와에게 저항하는 세력들로 나타난다(시 66:3; 68:1,21,23; 97:3; 8:2; 104:35; 145:20). 여호와께서 “열방”(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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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0; 96:7-10; 98:2,9; 99:2; 135:10)과 “왕들”(68:12,14; 135:10)의 심판자로 나타난다.21) 여호와의 왕국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나라들과 민족들의 도전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로 자처하

는 이스라엘의 ‘악’과 ‘죄’도 시편 2편이 안내하는 ‘문제적 상황’의 일부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할 때 그들은 세상 나라들과 그들의 왕들처럼 된다. 그래서 여러 시편들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죄의 문제와 심판과 용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44, 78, 89, 106, 95:8~11). 심지어 시편 2편에서 여호와가 반역하는 세상 나라들에 대한 대응으로 세운 왕조차도 범죄했을 때는 세상 나라의 통치자들처럼 버림받을 수 있다(89편). 실제로 시편 전체가 현재의 모습으로 편집되었을 시기는 포로기의 아픔을 겪고 난 이후이며 여전히 나라의 독립과 독자적인 왕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시편 2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서 시편들이 처한 상황을 잘 안내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 나라들과 통치자들이 하나님나라와 그의 대리통치자인 왕을 대적하는 상황이다. 이 문제적 상황에는 이스라엘과 그들의 왕조차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가능성이 포함된다. 하지만 시편 2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서 여호와와 그의 왕의 승리와 세계적인 하나님 왕국 건설에 대해서 낙관적이다(4~12절). 이런 왕국 건설의 핵심적인 요소는 여호와가 기름 부어 세운 인간 왕이다. 그는 1편이 안내하듯이 날마다 하늘 왕의 칙령인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행하는 왕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2편은 토라 묵상을 가장 우선적으로 여기는 ‘이상적인 본보기’로서의 왕에 대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22) 시편 2편은 모든 문제적 상황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온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펼칠 이상적인 왕의 등장을 확신하면서 전체 시편들을 이런 ‘복음’의 관점으로 읽게 한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세상 나라의 도전, 하나님나라 왕에 대한 세상 통치자들의 반역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정점을 이룬다. 온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확대할 왕으로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세상 통치자들의 반역은 사도행전 4장 25~28절에서 제자들에 의해서 정확하게 인식되고 있다. 특별히 27절에서는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마태복음 24장이나 요한계시록 등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교회와 하나님나라가 얼마나 세상나라들과 사탄의 왕국에 의해서 저항을 받게 될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편 1,2편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악인들에게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난이 세상왕국과 사탄의 왕국과 하나님나라 간의 싸움임을 인식하게 해준다. 많은 시편들에 등장하는 이방 나라들의 침략으로 인한 하나님나라 공동체의 탄식과 왕의 탄식, 그리고 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 등을 오늘날 교회의 탄식과 찬양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4. 시편 1,2편이 안내하는 시편의 복음시편 1,2편은 상황에 대한 암시로 끝나지 않고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복음은 사실은 시편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중요한 주제들을 보여준다.

가. 여호와는 온 세상의 왕-“하늘에 좌정하신 분”(2:4)시편 1,2편이 안내하는 시편 전체가 간직한 복음의 핵심에는 이 땅의 어떤 혼란과 죄악에도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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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는 “하늘에 좌정하신 분”(2:4)이 있다. 하늘 보좌에 좌정한 여호와의 웃음은 이 세상의 어떤 세상 권력들도 상대화시키는 웃음이다.23) 사실상 시편 2편은 다윗 왕가의 왕권보다는 여호와의 왕권과 세계 통치를 더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 왕이 중요하긴 하지만 실제로 보좌에 앉은 분은 여호와다(2:4). 인간 왕은 여호와가 자신의 왕국을 위해서 ‘아들’로 보좌에 앉힌 대리통치자이며(2:6), 여호와의 통치의 칙령을 받드는 ‘종’일 뿐이다(2:7). 그런 점에서 여호와의 왕권의 개념을 소개하는 것이 시편 전체에서 시편 2편이 하는 중요한 기능이다.

시편 1편에서 강조하는 여호와의 토라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도 사실상 시편 2편이 강조하는 ‘여호와가 통치하신다.’는 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시편 1편에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자 재판관으로서의 왕의 역할이 “의인의 길은 인정하고” “악인의 길은 심판하는 것”이라고 나온다(1:5~6). 그리고 시편 2편에서는 단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통치를 거역하는 세상의 나라들과 통치자들에 대해서 왕을 통해서 심판하시는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여호와의 통치가 개인적인 차원과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편 1,2편이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1,2편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도록 초대한다고 볼 수 있다. 시편 전체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담고 있다.24) 그래서 탄식시편이나 찬양시편들 모두에서 여호와가 왕이심이 고백된다. 탄식시편들이 왕이신 여호와께 구원을 간구한다면 찬양시편들은 과거에 여호와께서 행하신 구원과 창조의 위엄을 노래한다.25)

시편 1,2편이 여호와의 왕권을 안내한다는 것은 시편 전체에 퍼져 있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들이나 내용들을 통해서도 명백해진다. 여호와는 ‘왕’으로 자주 불린다(5:2; 10:16:24:7~10; 29:10; 44:4; 47:2,6,7; 48:2; 68:24; 74:12; 84:3; 95:3; 98:6; 99:4; 145:1). 여호와는 ‘나의 왕’(5:2등)이고 ‘능력 있는 왕’(99:4)이며, ‘위대한 왕’(47:2)이고 ‘큰 왕’(48:2)이며, ‘영광의 왕’(24:7-10)이고 ‘영원한 왕’(29:10; 10:16; 145:13)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나라들과 신들과 온 우주와 세계를 다스린다(22:19; 47:8; 59:13; 66:7; 67:4; 89:9; 93:1; 95:3; 96:10; 97:1, 4~5; 99:1; 103:19).26) 여호와는 하나님나라의 왕이다(103:22; 114:2; 145:11~13). 그의 보좌는 하늘에 있고(11:4; 103:19), 영원한 보좌(9:2)이자 거룩한 보좌(47:8)이며, 의와 악을 판결하는 보좌(9:4,7)이며, 그의 보좌의 기초는 공평과 정의다(89:14; 97:2). 여호와는 홍수 위(29:10)와 성전의 그룹 사이(80:1; 99:1)와 높은 곳(113:5)에 앉으셔서 다스리신다. 온 세상의 재판관으로서 세상을 재판한다(82:1~4; 96:13; 98:9).27) 여호와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지상의 수도는 시온(예루살렘)이며 그의 대리 통치자는 다윗 왕가의 왕이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들(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그들을 위한 통치의 원리로서 토라를 주었다.28) 이 부분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살펴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시편들은 ‘여호와가 왕’이라는 고백 위에 기초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Mays는 “여호와가 다스리신다.”는 고백을 시편 전체의 신학을 조직하는 중심이라고 적절하게 지적한다.29) “그(여호와)가 신적인 전사, 목자, 구원자, 심판자, 율법 수여자, 은혜의 시여자로서 갖는 정체성과 사역들은 모두 왕으로서의 그의 정체성과 사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30) 또 John Stek도 ‘위대한 왕’인 여호와가 시편 신학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31) 시편 1,2편의 안내와 관련해서 Stek의 아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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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것도 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지고의 왕권(이 왕권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초월적인 위대성과 선하심을 나타내 보이신다.)이야말로 시편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은유이자 그곳에 나타나는 신학적 개념들 중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개념이다. 이것은 구약성경 일반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것은 그 안에서 인간이 자신과 모든 피조세계, ‘자연’과 역사 속에서의 사건들,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아야 할 근본적인 전망을 제공해 준다. 모든 피조세계는 그분의 한 왕국이다. [중략]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택과 이에 이어진 다윗과 시온의 선택 그리고 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일은 하나님의 의로운 왕국이 반역과 악이 가득 찬 이 세상 속으로 다시 침투해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의로운 나라와 사악한 나라들 사이, 더 깊은 차원에서는 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 사이의 거대한 구분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후자의 구분은 심지어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발생하는 중요한 구분이다. 결국 하나님의 이 거룩한 사업이 승리를 거둘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낮아질 것이고 불의한 것들은 바로잡아질 것이다. 겸손한 자에게는 온 땅이 그들의 소유로 주어질 것이고 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32)

1,2편이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 제일 앞에 놓인 목적은 위에서 말한 여호와의 통치, 즉 하나님나라의 승리를 종말론적으로 안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6:6; 76:12; 79:6; 110:5~6; 93:1; 96:10).33) 이러한 전망이 모든 시편 기자들과 시편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는 ‘복음’의 핵심이 된다. 이런 ‘복음’의 관점에서 뒤따르는 모든 시인들의 기도와 탄식은 희망을 갖게 되며, 여호와의 구원과 최종적인 승리에 대한 찬양들은 그 성취를 기대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시편을 읽고 묵상하든지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선하심과 악인과 악한 세력들을 초극하는 하나님나라의 승리를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이 되는지를 강조할 수 있다. 고난당하는 의인의 승리는 결국은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의 대리 통치자인 왕-“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Axyvim. 2:2), “나의 왕”(yKil.m; 2:6), “내 아들”(ynIB. 2:7)

온 세상의 위대한 왕인 여호와는 자신의 통치를 다윗과 그의 후손들에게 위임하였다. 시편 2편은 이러한 신학을 잘 보여주면서 시편 전체에서 전략적으로 배치된 다른 제왕시편들(2, 18, 20, 21, 45, 72, 89, 101, 110, 132, 144편)과 함께 시편 전체를 메시야적인 관점에서 읽게 한다.34) 즉, 여호와의 통치, 하나님나라의 성공적인 완성은 반드시 이상적인 왕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고, 그래서 시편 전체는 그런 왕의 탄생을 기다리게 한다. 시편이 최종적으로 편집된 제2성전 시대에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시편 2편은 이 시편과 다른 제왕 시편들에서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왕을 기대하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1,2편이 안내하는 ‘복음’은 여호와의 대리통치자인 ‘왕’에게 밀착되어 있다.

시편 2편에서 등장하는 왕은 위대한 왕인 여호와가 세운 자신의 대리 통치자이다. 우선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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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여호와가 세운 ‘왕’으로 불린다(2:6; 18:50; 20:8; 21:1,7; 45:1,5; 61:6; 63:11; 72:1; 89:18). 여호와와 다윗 가문의 후손들이 동일하게 ‘왕’이라고 불리는 것은 여호와의 왕적 통치가 인간 왕들에게 위임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러한 위임을 나타내는 단어가 ‘기름부음 받은 자’(x:yvim')라는 단어이다(2:2; 20:7; 84:9; 89:38,51; 132:10). 이스라엘에서 ‘기름부음’은 인간 통치자를 여호와의 보호 아래 두는 행위였고 그의 권위를 세우는 표징이었다(시 105:15; 삼상 24:6; 시 89:20-28). 동시에 이 기름부음은 ‘여호와의 영’과 카리스마(삼상 10:1이하; 16:13이라; 삼하 23:1)와 직분 수행을 위한 권세와 직임(89:3,20; 132:11)이 왕에게 주어졌음을 의미했다. 한편 시 2편 7절에서 여호와는 왕을 ‘내 아들’이라고 부른다. 이 호칭은 왕이 기름부음을 받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대표자요 대행자로 임명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왕이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이 되어(89:27)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된 것’이다(110:1; 80:17). 이러한 입양은 사무엘 하 7:14에서 여호와가 다윗 왕조와 맺은 언약 가운데서 상징적으로 이루어졌다(89:27-28; 132:11; 사 55:3; 삼하 23:5; 렘 33:21). 비록 고대 근동의 국가들에서 인간 왕은 신의 아들로 종종 불렸지만 시편 2편이 말하는 ‘내 아들’이란 표현은 단지 신적인 권위를 나타내기 위함만이 아니라 여호와와 왕이 갖는 상호 교통과 하나 됨에 대한 상징적인 용어이다.35)

시편 2편은 왕이 여호와의 ‘칙령’ 혹은 ‘조서’에 의해서 임명되었음을 강조한다(2:7). 이것은 왕은 여호와에 의해서 임명된 대리통치자로서 철저하게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신명기 17:18~19과 여호수아 1:8에서 규정하는 것처럼 여호와가 세우는 왕이나 지도자는 철저하게 여호와의 토라에 순종하는 경건의 모범이자 이상적인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왕은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 평가되고(89:30~33), 여호와의 계명들을 늘 앞에 두어야 한다(18:20~22). 이런 점에서 시편 2편의 주제는 시편 1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앞에서 보았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그것에 순종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참된 왕인 여호와의 ‘공평’과 ‘정의’의 통치를 실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왕이 신적인 권위와 카리스마와 영을 부여받은 목적도 이 때문이다(시 72:1). 의롭게 재판하는 것은 약한 자와 억압받는 자들을 변호하고 위해서이다(시 72:2,4,12이하).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한다(시 45:7; 101편). 예루살렘에는 “재판을 위한 보좌 곧 다윗 가문의 보좌가 놓여 있었다.”(시 122:5) 시온은 여호와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호와의 거룩한 통치가 다윗 왕가의 왕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면에서도 ‘거룩한 산’이다. 왜냐하면 왕의 의로운 통치는 철저하게 공법과 정의를 보좌의 기초로 삼고 있는 여호와의 통치의 실현이기 때문이다(89:14; 97:2). 시편 1편 5~6절의 의인과 악인의 종말에 대한 선언은 사실은 여호와가 세우신 의로운 왕의 통치에 의해서 실현될 것이다. 왕의 의로운 통치는 반드시 샬롬과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준다(72, 132편).

한편, 시편 2편은 다윗 왕가의 왕은 반역하는 세력들(2:1~3)을 무찌르고 결국은 온 세상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노래한다(8~9절). 하지만 왕은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 여호와께 구해야 한다(8절). 그런 의미에서 왕은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승리를 간구하고(20편) 기도에 대한 응답에 대해서 감사와 찬양으로 반응한다(21편). 하나님나라를 대적하는 적들을 물리치는 전쟁의 승리는 왕에게 필수적이다(시 18:23, 39; 2:5,8-9; 20:7~8; 21:8-9; 110:1-3,5; 144:1-2).

전쟁에서의 승리는 온 세상에 여호와의 의로운 통치를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은 열방이 왕의 ‘유업’이 될 것이다(8절; 시 18:43-47; 72:8-11; 89:25). 이것은 세계 만국 백성들의 창조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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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재판관인 여호와의 우주적 통치권을 실현하는 것이다(시 24:1-2; 47:2,8; 89:11; 사 6:3).36) 그렇기 때문에 열방과 그들의 통치자들은 메시야의 통치 앞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하도록 요구받는다(2:10~12).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는 방법은 여호와의 통치를 실행하는 그의 아들에게 복종하는 의미(삼상 10:1; 왕상 19:18; 호 13:2)로 입 맞추는 것이다(2:12; 72:9~11). 12절의 마지막 행은 ‘그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음을 선언한다. 여기서 ‘그’가 지시하는 대상은 여호와가 될 수도 있고 그의 ‘아들’인 왕이 될 수도 있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시인은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그’라고 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상적인 왕을 의지하는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완성은 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 나라는 독재적인 철권통치가 아니라 여호와의 의로운 통치를 온 세상에 확대하는 것이다. 제일 끝에서 두 번째 시편인 149편이 제일 앞에서 두 번째 시편인 2편의 주제와 동일한 여호와의 온 세계 정복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왕의 정복이 여호와의 정복이라는 것을 잘 상기시켜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왕의 통치를 통한 하나님나라의 실현에 대한 P. D. Miller의 글은 매우 적실하다.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는 공평과 정의의 통치요, 안전과 복지의 통치며, 압제를 저항하는 통치이다(사 9:6~7; 11:1~5).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이 땅의 왕들과 통치자들을 다스리는 것은 한 독재자에서 다른 독재자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통치는 하나님의 왕국의 창조인데,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거나 잠재적으로 강한 세력들에 먹힐 수 있는 인간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 통치자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참으로 돌봐지고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 공동체이다.37)

이렇듯 여호와의 왕권과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시편 2편에 의하면 다윗 왕조의 ‘왕’에 의해서 실현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아들’이자 ‘기름부음 받은 자’인 왕 자체가 시편이 안내하는 복음이 되고 있다. 포로 귀환 공동체가 계속되는 열방과 제국의 통치자들의 위협 가운데서 시편을 읽는 방식은 이상적인 메시야의 도래였을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칼빈은 시편 2편의 내용은 예표이고 미래의 그리스도의 왕국과 관련된 예언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38)

왕을 다루고 있는 시편들이나 다윗과 관련된 시편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와 시험과 사역은 시편의 용어들로 잘 설명될 수 있다. 특별히 세례 장면은 분명하게 시편 2편의 즉위식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세워지는 왕의 즉위식이 예수님의 세례식이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백성들을 고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해주고, 의와 공평과 사랑의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희생하시고, 마침내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되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시편의 용어들로 분명히 설명될 수 있다. 시편 설교자들과 독자들은 이러한 시편 서론의 안내를 따라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제왕 시편들을 적용하는 일에 민감해야 할 것이다. 그분이 마지막 날에 오셔서 마침내 온 세상을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시고, 하나님께 유업으로 받은 온 세상을 하나님나라로 다시 바쳐드릴 소망을 가지고 시편들을 읽고 적용해야 할 것이다.

다. “거룩한 산 시온”(2:6)-예배와 왕권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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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왕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나라는 시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시편 1,2편이 제시하는 또 다른 ‘복음’의 내용이다. 이 주제 또한 시편 전반에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왜냐하면 시온은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시온에 있는 성전과 예루살렘의 왕궁은 하나님의 왕권과 다윗 왕조의 왕권을 상징하면서 하나님나라를 가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39)

시온은 ‘거룩한 산’(2:6; 3:4; 15:1; 43:3; 48:1; 87:1; 99:9)으로 불린다. 이 명칭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를 상징하는 위대한 왕의 왕궁인 ‘성전’의 존재를 알린다(5:8; 11:4; 18:7; 27:4; 29:9; 48:10; 65:5; 68:30; 79:1; 138:2). 그 왕궁은 ‘여호와의 집’(23:6; 27:4; 92:13; 118:26; 122:1; 135:2) 혹은 ‘장막’이나 ‘여호와의 궁정’ 등으로도 불린다(15:1; 27:5,6; 31:20; 61:4; 76:2; 84:1,10; 96:8; 100:4; 132:3). 시온 성소에는 공평과 정의의 말씀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을 상징하는 여호와의 보좌인 법궤가 놓여 있다(132:5이하; 시 78:68; 87:1; 132:13).40) 백성들은 이 성전에서 왕이신 여호와를 만나고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찬양을 올려드렸다.41)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예배의 공동체였다. 시편 1편의 5절이 “의인의 회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예배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111:1; 118:19,20; cf. 22:22,25; 40:9, 10). 그래서 2편 6절의 ‘성산’과 연결될 수 있다. 예루살렘은 예배의 장소였다(43:3; 42:4; 55:1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절기를 지키려고 시온으로 순례를 가곤 했다(시 122:4; 48:9; 84:10; 29:9~10). 하지만 성전이 있는 성산에는 여호와의 토라를 지키는 거룩한 자들만이 초대받을 수 있었다(15:1; 24:3). 결국 예배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공평’과 ‘정의’라는 여호와의 통치였던 것이다(시 37:28; 50:16-21; 82:3; 98:9; 99:4; 103:6; 119:5-7; 146:7; 147:19).42) 예루살렘에는 “여호와의 집”과 더불어 “다윗의 집”도 있다. 이것은 “심판의 보좌”로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과 온 세상에 공평과 정의의 통치를 실현하는 집이다(122:5). 그런 의미에서 시온은 ‘거룩하다.’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은 여호와가 시온의 성전에 거하신다는 것으로 가장 분명하게 상징되었다(87:1; 132:13~14).43) 여호와의 보좌와 왕궁은 하늘에 있지만(103:19; 123:1) 시온과 시온의 성전이 그 보좌와 왕궁을 대표하고 반영한다(99:5; 29:1,9~10; 11:4). 여호와가 시온 성에 거하기 때문에 시온은 어떤 세력들의 공격에 대해서도 안전하다(46, 48, 87편; 125:1~2). 시온에서 여호와는 샬롬을 이루며 자신의 백성들에게 구원과 복을 내린다(122:6이하; 128:5; 132:15~16; 133:3; 134:3).

온 세상의 위대한 왕인 여호와가 시온을 온 세상을 다스리는 지상의 수도로 택하였기에 ‘큰 왕의 성’(48:2)인 예루살렘(시온)은 ‘거룩한 산’이고 ‘하나님의 성’이다(48:1). 시온 산은 온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를 상징하고 그것을 드러낸다.44) 여호와의 통치가 ‘공평’과 ‘정의’의 통치이기 때문에 그 통치의 중심인 시온은 “온 땅의 기쁨”이라 불린다(48:2). 그런 의미에서 시온은 세계의 중심이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시온으로 열국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87편?; 사 2:2~4).

결론적으로 시온은 여호와와 그의 왕의 통치의 온전한 실현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수많은 선지서들은 시온의 회복을 하나님나라의 회복으로 연결시키고 있고, 메시야의 도래와 연결시키고 있다. 마지막 날에 샬롬과 거룩과 공의의 장소로서의 시온은 온 세상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래서 시편 1,2편은 여호와와 왕이 거하는 장소로서의 거룩한 산 시온을 복음의 한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다. 시편을 읽는 독자들에게 예배의 장소이자 피난처이자 구원과 축복의 장소를 안내하면서, 이런 관점에서도 시편 전체를 읽을 것을 권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시편 자체가 왕이신 여호와를 만나는 문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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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이자, 예배의 자리이자, 구원과 축복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시편 1,2편이 안내하는 또 다른 복음인 하나님나라의 중심 ‘거룩한 산 시온’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취되고 있다. 교회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회복되고 있고, 예배를 통하여 그분의 의와 공평의 거룩한 통치가 이루어진다. 성도들은 교회를 통해서 의롭고 공평한 삶을 배우며, 교회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한다. 그들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 교회로 돌아올 것이다. 그 교회는 마침내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될 것이고, 그 ‘새 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다. 이처럼 1,2편이 안내하는 대로 우리는 ‘예배,’ ‘성전,’ ‘시온,’ ‘예루살렘’과 관련된 시편들을 읽고 적용할 때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시켜야 할 것이다.

라. 여호와의 나라의 행복 원리: 토라(hr"wOT) 묵상(1:2)과 여호와 의지(2:12)시편 1,2편은 축복의 선언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비롯한 여호와의 백성들이 행복할 수 있는 두

가지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1:1; 2:12). 이 두 가지 길은 단지 1,2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편 전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선언되는 ‘복음’이다. 여호와의 백성들이라면 여호와의의 통치 원리인 토라를 따라 살아야만 그가 약속하는 복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 상황은 악인들과 대적하는 세력들이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여호와를 의지해야만 약속한 복을 누릴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1,19,119편 등의 토라 시편들의 배치는 시편 전체에서 토라 경건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특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명기 17장과 여호수아 1장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고, 역사서 전반에 걸쳐서 강조하는 있는 것을 압축한 것에 불과하다. 시편 1편 2절에서 말하는 ‘토라’는 단지 ‘율법’만을 가리키지 않고 여호와의 통치의 수단인 여호와의 길을 나타내는 모든 ‘말씀’ 혹은 ‘교훈’ 혹은 ‘가르침’을 뜻한다.45) 칼빈은 이것을 “하늘의 지혜”라고 부른다.46) 토라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으로 사람이 삶에서 걸어가야 하는 좋은 길이다. 토라는 낙심시키는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사람의 지속적 관심과 기쁨과 즐거움의 대상이며, 그것을 즐거워하고 따르는 자들에게 복된 결과를 가져온다.47) 잎이 무성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될 것이다. 이 토라에는 이제 한권의 책으로 묶여진 시편도 포함된다. 1편은 시편들을 단지 예배를 위한 예전으로서가 아니라, 오경처럼 참된 경건과 윤리를 위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묵상해야 함을 격려하고 있다.48) 사실 시편은 그 이전에도 이미 말씀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예배 중에 반복된 시편들의 사용은 이미 백성들의 삶을 형성하는 교훈들을 제공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역사시편들은 여호와가 행하신 일들을 회고함으로써 교훈을 제공하였고(시 92:4,5; 107:22; 77:11~12), 많은 기도와 찬양들은 여호와와 창조와 인간에 대해서 이미 많은 가르침들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토라 시편인 19편은 우주와 토라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노래하면서, 이 토라를 따라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하는 시편이다. 시편 119편은 다양한 단어들로 토라를 가리키고, 다양한 문학적 형태로 토라 경건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찬양, 감사, 탄식, 확신, 교훈의 모든 형태 속에서 여호와의 교훈이 삶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관점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49) 이 외에도 많은 시편들에서 토라 경건을 담고 있는 표현들이 등장한다(시 15; 18; 24; 25; 33; 78; 89; 93; 94; 99; 103; 105; 111; 112; 147; 148).50) 이런 시편들에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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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들의 무고한 공격을 당하거나 토라를 지키는 일에 실패한 의인들의 탄식과,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에 대한 그의 기도 응답과 구원에 대한 감사,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 여호와에 대한 찬양 등을 담고 있다. 이런 주제들이 시편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은 시편 1편이 안내하는 대로 여호와의 왕국의 통치 원리인 토라 경건의 관점에서 시편을 읽어야 함을 보여준다. 비록 현실 속에서는 토라를 지키면서 사는 자들이 항상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관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토라 경건 외에 여호와의 백성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길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지하는 것이다(2:12). 여호와의 토라를 지키는 자들이 악인들에게 무고하게 공격을 받을 때 궁극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대상은 왕이요 보호자요 재판관인 여호와(와 그의 왕)뿐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라를 지키는 일에 실패한 자들이 피할 수 있는 피난처도 여호와이다. 이러한 ‘의지’ ‘신뢰’ ‘피함’의 주제들이 시편 전체를 꿰뚫는 또 하나의 주제이다. 3편 이하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들과 수많은 탄식 시편들은 사실상 2:12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51)

Creach에 의하면 제1권에서 2:12의 ‘피하다’는 단어는 여덟 번 반복되고 있고(5:12; 17:7; 18:31; 31:20; 34:9,23; 36:8; 37:40), 일곱 개의 시편(6,8,15,23,24,29,41편)만 빼고는 모두 최소한 ‘피함’과 관련된 단어들 중의 하나는 갖고 있다. 시편 2~41편은 부분적으로는 의인들에 대한 묘사를 둘러싸고 구성되어 있는데, 이 묘사는 ‘여호와를 피난처로 구하는 것’을 주요 구성 특징으로 삼는다고 볼 수 있다.52) 여호와를 피난처로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여호와의 통치가 주는 도움을 묘사했던 한 방법이었다.53) 시편 제 1권외에도 여호와를 유일한 보호의 근원으로 믿고 의지하는 주제는 시편 전체에 두루 나타난다.54) 이것은 왜 시편 2편이 시편의 서론으로 위치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인 셈이다.

특별히 시편 1편의 토라 묵상과 시편 2편의 여호와를 피난처로 구하는 것은 시편의 최종 편집 단계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들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토라 묵상도 원수들로부터 스스로를 영적으로 지키는 수단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94:13).55) 시편 전체가 왕이신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에 대한 가이드로 의도된 것이라면 이러한 의존을 표현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은 토라 묵상이었다(94:12~13).56) 토라는 시편 기자들에게 피난처로 표현되기도 한다(119:81). 여호와의 말씀이 구원과 힘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119:81, 114, 147; 52:8).57) 시편 1편 3절에서 시냇가에 심긴 나무에게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은 토라인 것도 사실이다. 에스겔서 47:1~12에서 성전에서 나오는 생명수에 의해서 나무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시편 1,2편은 서론으로서 토라 묵상과 여호와(와 그의 왕)를 의지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토라를 무시하는 악인들, 여호와의 왕권을 부정하려고 하는 자들이 판을 치는 현실 가운데서도, 결국은 하나님나라의 왕인 여호와만이 피난처가 되시고 그의 길인 토라만이 진정한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복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선언은 왜 수많은 탄식시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부르짖고 있는지와, 고통 가운데서도 시인들이 왜 여호와의 길을 고집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이것은 단순한 미래적 소망이 아니라 3편 이하의 수많은 시편들 가운데서 거듭 거듭 증언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편 1,2편이 안내하는 복음은 수많은 시편들을 통해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강조해야 함을 의미한다. 아무리 말씀대로 사는 자들이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결국은 그들이 ‘복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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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임을 확실하게 선포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수많은 기도 시편들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환란과 고통 가운데서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여야 함을 교훈 받는다.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자가 결국은 복 있는 자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복음은 예수님의 팔복 선언을 비롯한 많은 교훈들과 연결될 수 있다.

마. 여호와의 나라의 미래: 악인의 멸망과 의인(여호와의 백성)의 형통시편 1,2편이 말하는 의인은 온 세상의 위대한 왕인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다. 시편 1,2편은 서론이자 시편 전체의 일종의 결론으로서 이러한 의인들의 형통함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멸망에 대해서 분명히 선포한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1:6) 이러한 대조는 물가에 심긴 나무 비유(#[eK.)와 바람에 나는 겨(#MoK;)의 대조에서 뚜렷하게 표현된다. 또한 이 주제는 2편에서 세계적인 세력들로 확대된다.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끝까지 대적하는 열방과 그들의 통치자들은, 여호와의 왕에 의해서 깨뜨려지고(2:9) 여호와의 진노에 의해서 그들의 길에서 망하고 말 것이다(2:12).

하지만 시편 1,2편이 제시하는 문제적 상황은 악인들과 여호와의 대적들이 의인들과 여호와의 왕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포로귀환 공동체에게는 시편 1,2편이 안내하는 복음이 까마득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의인의 형통과 악인의 멸망이라는 이 주제는 그저 종말론적인 미래58)의 소망만은 아니다. 3편 이후의 시편들은 그것이 탄식이든, 기도든, 찬양이든, 감사이든, 교훈이든 거듭거듭 의인의 형통과 구원(68:6; 106:5; 118:25,26; 122:6,7; 128:2; 32:1; 33:12; 34:8; 40:4; 41:1; 65:4; 73:28; 84:4,5,12; 89:15; 94:12; 106:3; 112:2; 119:1,2; 137:9; 144:15; 146:5; 21:1; 22:21; 35:9; 37:39,40; 62:1,2; 68:19,20; 96:2; 132:16; 149:4 등)과 악인의 멸망(5:6; 9:5,6; 10:16; 35:8,17; 37:20,38; 39:11; 49:12,14,20; 52:5; 54:5; 55:9; 59:13; 71:13; 73:19,27; 74:11; 83:17; 92:7; 101:8; 104:35; 137:8; 143:12; 145:20 등)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이 지적하듯이 악인들은 형통하는 것 같지만 순식간에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확신이다.59)

시편 1,2편은 여호와의 통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통치 실현을 위해서 왕과 토라와 시온을 통치의 수단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여호와가 이런 수단들과 자신의 능력으로 그의 통치를 가로막는 악인들과 열방의 반역자들을 멸망시킬 것을 시편 기자들의 증언을 담아서 종말론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나라의 완성이자 의인들의 최종적 구원이며 시편이 말하는 복음이다.

많은 시편들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승리를 적용할 수 있다. 일상적인 신앙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의 예수님의 최후의 승리까지 시편들은 잘 보여준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고 의인과 하나님나라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사는 삶의 모습을 시편을 통해서 매우 실제적으로 설교할 수 있고 또 배울 수 있을 것이다.

5. 요약 및 결론 시편1,2편은 어휘적으로나 주제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서의 역

할을 효과적으로 하고 있다. 먼저, 이 두 시편은 각 시편을 읽을 때 어떤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는지를 잘 암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악인들의 유혹과 공격을 물리쳐야 하고, 국가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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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열방과 통치자들의 압제와 공격을 이겨내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시편 1,2편은 상황에 대한 암시로 끝나지 않고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여호와의 왕국의 승리이고 완성이다. 여호와의 통치의 실현은 그의 통치의 매뉴얼인 토라의 묵상과 실천으로 가능하며, 그 토라를 묵상하고 국가적 통치에 적용하고 대적들을 물리치는 인간 왕의 대리 통치로 실현된다. 그리고 여호와의 왕국은 여호와의 임재와 거룩한 예배가 이루어지는 성전이 있고, 의와 공평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왕의 왕궁이 있는 시온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왕을 통한 여호와의 통치는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구원과 축복을 가져온다. 하나님나라를 대적하는 세력들이 완전히 멸망할 때 온 세상은 하나님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든 세상 나라들과 통치자들이든 여호와의 통치와 왕권을 두려워하며 그와 그의 왕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만이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상이 시편 1,2편이 안내하는 시편의 주제이자 복음이다.

시편은 분명히 하나님나라 왕이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 왕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의한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예언하고 있다. 시편 기자들은 이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분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감정과 의지를 매우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전체에 대한 시편 1,2편의 안내는 매우 적절한 것이며, 시편을 묵상하고 적용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염두에 두고 참고해야 할 귀한 서론인 셈이다.

※ 부록 1. 오늘날의 시편이 있기까지의 역사

개별적 혹은

예배를 위한 창작

포로기, 포로기 이후-시편집 I 편

집(?), 모음집들

왕국시대 - 수집을 통한

모음집 형성, 표제 붙이기

주전 3세기(?) 제 2 성전

시대 - 최종 편집

모세

다윗

솔로몬

아삽

고라 자손

다윗의 기도집?

고라자손의 시집

아삽의 시집

시편집 I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할렐루야 시편

150편, 5권으로

구성된 시편

개인적, 공동체적 시편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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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편 신학의 역동성

1)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vol. 1: Reprinted, trans. James Anderso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8), 1. 2) Jerome F. D. Creach는 물가에 심긴 비유를 예레미야 17:8과 에스겔 47:12와 연관시키면서 이 비유의 출처가 성소에서 나오는 강가에 심긴 나무 비유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시편 1편은 성소를 대신해서 토라가 물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연결해서 보면 시편 2편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워진 왕은 성전의 물가에 심긴 의인인 셈이다. "Like a Tree Planted by the Temple Stream: The Portrait of the Righteous in Psalm 1:3," CBQ 61(1999), 46. 3) Phil J Botha, “The ideological interface between Psalm 1 and Psalm 2,” Old Testament

Essays vol. 18, no. 2(2005)189-203의 pdf 변환 파일, 13, http://www.up.ac.za/dspace/bitstream/2263/11334/1/Botha_Ideological%282005%29.pdf(2011년 3월

20일 검색).4) Ibid. 5) James L. Mays, The Lord Reigns: A Theological Handbook of the Psalms (L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132~133. 6) Ibid., 122, 12~22. 7) Ibid., 122. 8) Ibid. 9) Calvin, 2. 10) Gerald H. Wilson, Psalms vol. 1,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Grand Rapids: Zondervan, 2002), 82. 11) J. C. McCann, Jr. A Theological Introduction to the Book of Psalms: the Psalms as Torah (Nashville: Abingdon Press, 1993), 34~35.12) Ibid., 38. 13) Willem A. VanGemeren, Psalms,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Revise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8), 87.14) Ibid.15) H.-J. 크라우스, 시편의 신학, 신윤수 옮김(서울: 비블리아 아카데미아, 2004), 311이하. 16) VanGemeren, 90. 17) 피터 크레이기, 『시편 1-50』, WBC 성경주석, 손석태 역(서울: 솔로몬, 2001), 74; 김정우, 165~166; Mays, The Lord Reigns, 111에 설명된 즉위식 광경 참조. 18) Ibid.; P. D. Miller, Interpreting the Psalm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6), 88. 19) Ibid.; VanGemeren, 93. 20) Kraus, 시편의 신학, 304~305. 21) Ibid., 308~309. 22) Jamie A. Grant, The King as Exemplar: the Function of Deuteronomy's Kingship Law in the Shaping of the Book of Psalms, Academia Biblica 17(Atlanta: Society of Biblical

하나님

= 지존하신 왕

= 의로운 재판관

의인

=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 왕

악인, 원수

= 하나님을 부인하고

의인을 핍박하는 자

말씀 기도 응답

= 구원축복

심판기도(탄식)

감사, 찬양

대적 부인

대응안함

핍박 억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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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ture, 2004), 67. 23) P. D. Miller, Interpreting the Psalms, 90. 24) McCann, Jr., A Theological Introduction, 48. 25) VanGemeren, 119. 26) Mays, The Lord Reigns, 14. 27) Kraus, 시편의 신학, 62~63. 28) Mays, The Lord Reigns, 14. 29) Ibid., 13. 30) Ibid., 17. 31) 존 스택, 『구약신학』, 류호준 역(서울: 솔로몬, 2000), 580~586. 32) Ibid., 585~586. 33) VanGemeren, 122. 34) Mays, The Lord Reigns, 99~107. 35) Kraus, 시편의 신학, 265~277.36) Ibid., 291~96. 37) P. D. Miller, Interpreting the Psalms, 91. 38) Calvin, 9 참조. 39) VanGemeren, 408. 40) Kraus, 시편의 신학, 176. 41) 존 스택, 585. 42) Kraus, 시편의 신학, 244. 43) 존 스택, 585. 44) Mays, The Lord Reigns, 18. 45) Kraus, 시편의 신학, 390.46) Calvin, 1. 47) Miller, Interpreting the Psalms, 83.48) Ibid., 86. 49) Mays, The Lord Reigns, 130~31. 50) Ibid. 51) Mays, The Lord Reigns, 122. 52) Creach, Yahweh as Refuge. 74~77. 53) Ibid., 73. 54) Ibid., 103~105. 55) Ibid., 79. 56) Ibid., 73. 57) Ibid., 69~71. 58) Grant, 50~52. 59) Calvin,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