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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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monthly culture magazine culture naru 2010 01-02 2010년, 이어가기 혹은 다시 시작하기 설치미술가 이승택 호랑이가 살고 있는 안성 복거마을

Transcript of 2010 01-02

2010 no.08 1

bimonthly culture magazine culture•naru

2010 01-02 • 2010년, 이어가기 혹은 다시 시작하기 •

• 설치미술가 이승택 •• 호랑이가 살고 있는 안성 복거마을 •

2 2010 no.08 1

Contents

02 문화의 창군자표변-낯만 바꾸지 말고 마음까지 제대로 개혁하라

04 마을 산책 안성 복거마을

08 특집 2010년, 이어가기 혹은 다시 시작하기

10 제야에서새해로이어지는풍경

12 마을공동체의기풍의례,해동화놀이

16 새해를맞이하는서계종가의긴하루

22 경기도사람들의새해맞이

24 스페셜인터뷰 설치미술가 이승택

30 문화+공간 경기창작센터 / ISCP

36 마음을 건드리다 조선시대의 <호표흉배>

38 전통을 잇는다 나전칠기 명장 배금용

42 경기, 근대의 풍경을 찾아 고양 일산역

44 전시산책 <제1회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작가전> / <조선 왕릉 사진전>

52 예술사용설명서 <몬순 프로젝트 2009>로 보는 다원 예술

54 문화 현장 새터민 문예 창작 / 남한산성 솔바람 책방 / 꿈꾸는 아이들의 축제

60 문화+기업 삼성생명 흰개미 탐지견 활동

62 해외통신원 리포트 네덜란드의 어린이박물관 / 스페인의 어린이 교육공원

64 사진에세이 구성연의 시선

66 문화소식 Review / Museum・Play・Festival / Calendar

72 편집위원칼럼 생각보다 쓸모가 많은 미술관 탐구생활

경기문화나루2010년1·2월호통권8호(비매품)2010년1월1일발행등록번호경기마00127등록년월일2008년10월8일간별 격월간ISSN2005-3371

발행인권영빈|편집인전종덕|발행경기문화재단(442-835경기도수원시팔달구인계동1116-1,전화031-231-7267,www.ggcf.or.kr)

기획·편집·디자인경기문화재단문화협력실문화홍보팀_박종강,김수정,이나진,강혜란,이학성|사진사진작업실류가헌_이한구,고성홍|출력·인쇄삼진애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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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의 창

2010년은 경인庚寅년이다. 일곱 번째 천간天干인 ‘경庚’은 ‘고친

다’는 뜻이다. 세 번째 지지地支인 ‘인寅’은 ‘범’을 뜻한다. 고친다는

것은, 고쳐서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니 경인庚寅이란 두 글

자는 범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뜻을 자연스럽게 내포한

다. 마침 <주역>에 범의 변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군자표변

君子豹變’이 바로 그것이다.

성실한 자기혁신이 필요하다

범이 여름을 나고 가을에 접어들면 털갈이를 하는데 여름에 드문

드문 났던 털이 가을이 되면서 빛이 날 정도로 완전히 털갈이를 하

게 된다. 이처럼 표변豹變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함을 뜻

한다. 예전에는 군자君子가 숙녀淑女와 대비되는 개념이었지만 현

대사회에서 군자라는 말은 인격을 갖춘 사람 정도로 통용된다. 그

러므로 군자표변은 인격체로서의 군자라면 새로운 변화를 도모함

에 있어 범이 가을철에 털갈이하듯이 하라는 의미다. <주역>에는

이와 상반된 말이 있는데 ‘소인혁면小人革面’이 바로 그것이다. ‘혁

면革面’이란 ‘낯을 고친다’는 의미다. 군자는 자신과 사회를 새롭게

고치기 위한 노력을 범이 털갈이하듯 하지만 소인은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낯만 살짝 바꾸어 고치는 척한다는 의미다.

왜 범이 가을철에 털갈이를 하는가? 범의 가을철 털갈이는 다

가올 겨울 추위를 대비한 자기혁신이다. 만약 범이 털갈이를 해야

할 시점에 털갈이를 하지 않는다든가, 하더라도 소소하게 한다면

다가오는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뎌내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가을

철 범이 털갈이하며 미래를 대비하듯이 사람도 새해에 여러 가지

닥쳐올 새로운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혁면革面이 아닌 혁심革心

의 성실한 자기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군자표변의 참뜻이다.

군자표변이란 말은 <주역>에서 고친다는 뜻을 지닌 괘인 ‘혁괘

革卦’에 나오는데 그 의미를 음미해볼 만하다. 주역의 괘는 모두 64

괘다. 64괘는 8괘가 서로 사귀어 이룬 것으로 우리나라 태극기에

있는 건곤감리乾坤坎離에서도 볼 수 있듯이 8괘는 모두 세 획으

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8괘를 거듭한 64괘는 모두 여섯 획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세 획을 상괘上卦라 하고 아래의 세 획을 하

괘下卦라 한다.

택화혁 澤火革

경인庚寅을 괘로 연관지어볼 때, 위에 있는 경庚은 서방西方

금金에 해당하므로 팔괘로는 태괘兌卦로 볼 수 있다. 아래에 있는

인寅은 팔괘로는 세 번째에 있는 이괘離(火)卦로 볼 수 있다. 이 둘

이 합해서 위에는 태괘兌(澤)卦, 아래는 이괘離卦로 이루어진 택화

혁괘澤火革卦를 이룬다. 경인庚寅이 곧 혁革이요, 혁革이 곧 경인

庚寅이다. 혁괘는 위의 태괘兌卦와 아래의 이괘離卦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택화澤火는 ‘고칠 혁革’이 된다. 또 혁革은 주역의 64괘

가운데 49번째 있다. 주역에서 49란 수 또한 모든 변화를 이루어나

가는 수이다.

혁괘의 의미를 여름과 겨울이란 계절의 차원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공자가 혁괘에 ‘천지도 음양을 바꾸어 춘하추동 사시를 이

루는 혁을 하고 있다’고 했듯이 봄여름가을겨울이 모두 바뀌는 것

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여름[火]에서 가을[金]로

의 변화이다. 그리고 여름에서 가을로의 변화를 하괘[離火]와 상

괘[兌金]로 나타내고 있는 괘가 바로 혁괘다. 그러므로 세시풍속

에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혁革을 잘 이루고자 삼복三伏을

두고 있는 것이다. 삼복을 모두 고친다는 의미의 경일庚日로 삼은

것도 삼복 기간 동안 여름철 더위 속에 지쳐 있던 몸을 잘 고쳐서

가을 기운을 듬뿍 지고 나오기 위함이다.

때를 알고, 밝음과 기쁨으로 결실을 이루는 개혁

그렇다면 고친다는 의미의 경인년, 고친다는 혁괘는 우리에게 어

떤 충고를 하고 있는가?

첫째, 개혁의 합당한 시기에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고

쳐야 할 때가 아닌데 고친다거나 고쳐야 할 때를 놓쳐서 뒤늦게 고

치는 것은 모두 때를 잃은 것이다. 심사숙고하며 시기를 관망하다

가 고쳐야 할 시기에 고쳐야 할 대상을 고친다면 주위에서 그 개

혁의 타당성에 대해 믿어주고 찬성할 것이니 이것이 곧 지시식변知

時識變이다.

둘째, 밝음과 기쁨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밝음이란 아래

에 있는 남방南方 이괘離卦가 지니고 있는 덕德인데 불처럼 문명

의 덕으로 사리를 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쁨이란 서

방西方 태괘兌卦가 지니고 있는 덕인데, 우격다짐이 아닌 화열和說

의 덕으로 변화를 추진해나가라는 의미다.

셋째, 혁의 상괘인 태괘는 경제적인 결실을 의미하고, 혁의 하

괘인 불은 번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차원에서 변화를 이

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를 실질적으로 살려내야 한다는 의

미가 있다.

군자표변은 <주역> 혁괘의 맨 위에 자리한 효爻에 있는 말이다.

64괘의 6효는 맨 아래가 처음이 되고 맨 위가 마지막이 된다. 그러

므로 맨 위에 있다는 것은 미완이 아닌 완전한 ‘혁革’을 의미한다.

새해가 되면 대부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각오를 하곤 한다. 그러

다 세말이 되어 되돌아보면 다짐했던 변화를 이루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어느 달이 새롭지 않으랴!’는 일신우

신日新又新의 자세가 필요하다. 경인庚寅년은 철저히 새로운 모습

으로 변화한다는 경인庚寅의 의미 그대로 각 분야에서 군자표변

君子豹變의 자기혁신自己革新을 이루는 해가 되길 바란다.

대산大山 김석진현재우리나라주역연구의최고권위자다.1928년생으로,조부에게한

문의기본경전을배웠다.15세에논산군가야곡심상소학교를졸업하고,19세(1946)때

부터대둔산석천암으로‘주역의달인’야산선생을찾아가13년간주역을배웠다.대전에

서홍륜학교한문강사,양정학원원장,(사)동방문화진흥회회장,동방대학원대학교석좌

교수를지냈다.1985년부터지금까지20년넘게주역을강의하고있다.지은책으로는<주

역과세계>,<명과호송>,<대산주역강해>,<주역점해>,<미래를여는주역>,<주역전의대전역

해>,<가정의례와생활역학>,<대산주역강의>,<하늘땅사람이야기-대산의천부경>등이

있다.

澤(兌)

火(離)

革(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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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이중성까지도 인간을 닮았네!

2010년은 호랑이의 해. 새삼, 숱한 민담과 설화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호랑이만큼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동물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사는 곳과 멀지 않은 곳이라 한가한 틈을 타서 복거마을을 어슬렁거리며, 마을 여기저기의 호랑이 그림과 조형물들을 두루 보았다. 호랑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 마을. 호랑이가 마을로 내려올까봐 밤마다 두려움에 떨며 살던 시절도 있는데, 이제는 더불어 살아가다니! 자, 호랑이 마을에 왔으니 호랑이 이야기나 실컷 해보자.

글장석주_시인|사진이한구,고성홍

안성시 금광면 복거마을은 호랑이 전설이 유난히 많은 동네다. 이 마을은 뒷산의 솟은 모양이 호랑이

가 엎드려 앉은 형상이라고 해서 호동虎洞 혹은 복호리伏虎里라고 하였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폐

농기구로 만든 익살스러운 호랑이가 서 있고, 담벼락에는 민화에 나오는 담배 피우는 호랑이가 그려

있다. 대안미술공간 소나무갤러리(관장 최예문)를 중심으로 지역 예술가와 대학생들이 함께 작업한

‘아름다운 미술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의 결과다.

인간보다 신령스러운 호랑이

호랑이는 12지의 세 번째 동물로, 용맹한 산짐승이다. 옛 책인 <역경易經>에 보면 “구름은 용을 따르

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호랑이의 날램과 용맹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조

선시대 대오방기大五方旗 가운데 하나인 우영右營의 의장기에는 날개 달린 백호가 사슴뿔을 양손에

들고 서 있는 그림이 그려 있다. 이즈막에도 맹호 부대니 백호 부대니 해서 호랑이를 군대의 표징으로

삼는 것은 군인에게 호랑이의 용맹성을 고취시키기 위함이다. 호랑이는 강력한 지도자, 신성, 밤의 배

회자를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호랑이는 대표적인 벽사辟邪 동물이다. 조선시대의 민속을 다룬 <동국

세시기>에 보면, 정월에는 호랑이 그림을 대문에 붙여두었다. 역병과 재앙, 갖가지 흉사를 물리치는 데

호랑이의 힘을 빌리기 위한 민간의 지혜다. 경복궁 영추문에는 백호도가 남아 있는데, 백호는 서방西

方과 가을을 상징한다. 그런가 하면 호랑이는 지하계의 어두운 세력, 강력한 파괴자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들은 호랑이를 산군자, 산신령, 산중 영웅이라고 불렀다.

단군 신화에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두 동물이 나오는데, 곰과 범이 그들이다. 곰을 섬기는 부족과

범을 섬기는 부족이 경쟁하는 이야기다. 이때 범은 호랑이다. 견훤이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에서 일하

는 아버지의 밥을 내가기 위해 견훤을 나무 그늘 아래에 두고 갔는데, 돌아와 보니 범이 와서 젖을 먹

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호랑이는 국조의 조력자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삼국유사>에도 호랑이에 대

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진덕왕 때 여섯 지도자가 남산에서 국사를 논의하고 있는데, 별안간 호랑이

가 좌중에 들어섰다. 알천공이 호랑이 꼬리를 한 손으로 잡아 메어쳐 죽여, 상좌에 앉게 되었다.” 조선

성종 때의 책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호랑이가 나온다. 스님으로 둔갑한 호랑이가 강감찬의 용맹스

러움에 기가 질려 새끼 호랑이들을 데리고 서울을 떠난다는 이야기다. 연암 박지원의 <호질虎叱>, 유

몽인의 <호정문虎穽文>, 이광정의 <호예虎睨> 들은 호랑이의 사나운 기세를 빌려 사람의 위선됨과 더

러운 관리들의 잔혹함을 천하에 일러바친다.

마 을 산 책 _ 안 성 복 거 마 을 에 서 만 난 호 랑 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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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 벽화의 사신도에도 백호가 나온다. 민화에는 호랑이가 소나무나 까치와 함께 나오는데, 이때

소나무는 장수長壽, 까치는 기쁨, 호랑이는 보은報恩을 나타낸다. 산신도山神圖에도 호랑이가 나타난

다. 소나무 아래 산신이 앉아 있고, 그 발치에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그림이 산신도다. 이때 호랑이는

산신의 심부름꾼이다. 때로는 호랑이가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산신으로 나오기도 한다. 호랑이는 신

수神獸인 것이다. 무당들은 신령스러운 호랑이를 산군山君으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친구이고 동시에 적이었던 존재

설화 속의 호랑이는 은혜를 갚고, 효행이 신실한 이들을 돕는 의로운 동물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상주에서 의용병을 일으켜 왜적들과 싸운 용맹스러운 청년이다. 그가 산중에서

무술 훈련을 하다가 큰 바위만 한 호랑이와 만났다. 칼을 빼들고 호랑이와 대적했는데, 호랑이는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밤새도록 호랑이 뒤를 쫓다가 깊은 산중에서 불이 켜진 초가

집을 발견했다. 그 집에는 어린 처녀 혼자 살고 있어서, 그가 연유를 물었다. “어느 날 호랑이가 나타나

제 늙은 부모님 두 분을 물고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산중에 초가를 짓고 풀뿌리를 먹으며 부모의 원수

를 갚아줄 의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녀의 얘기를 듣고 새벽에 호랑이가 산다는 굴로 갔다. 호랑이

가 나타나지 않자 곽재우와 처녀는 굴 속으로 들어갔다. 굴 속을 한참 들어가니 마른 풀더미 위에 처

녀의 늙은 부모가 앉아 있었다. 호랑이는 처녀의 부모에게 해를 끼친 게 아니라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

운 난세에 의로운 이들을 보호하려고 제 굴로 피신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는 본질적으로 맹수다. 옛날에는 호랑이에 잡아먹히는 사람이 드물지 않았다. 산길

을 갈 때는 말린 쑥을 뭉쳐서 불을 붙여 지녔는데, 이는 불을 무서워하는 호랑이의 습성을 이용해 호

랑이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또 흰 창호지로 옷을 지어 그걸 겉옷으로 걸쳐 입고 산을 넘었는데, 이도 호

랑이가 흰색을 잘 보지 못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산에서는 ‘범’이나 ‘호랑이’라는 말을 삼갔는데,

이는 이 말을 입에 올리면 실제로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피해

를 입었다는 기록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특히 삼척·태백·정선·영월·명주 땅에는 호랑이에게 잡아

먹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온다.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사람의 무덤을 ‘호식총虎食塚’이라

고 하는데, 호난을 당한 사람의 시신을 화장해서 그 위에 돌무더기를 만들거나 시루를 씌운 무덤이다.

지금도 강원도의 태백이나 정선, 삼척 등지에는 수십 기의 호식총이 남아 있다.

아름다운 야성의 호랑이가 그립다

이 땅은 산이 높고 골은 깊어 수많은 호랑이가 살았다. 그러나 무분별한 남획과 전쟁으로 인한 서식지

파괴 등으로 어느 틈엔가 호랑이는 한 마리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별과 행성의 힘이

땅의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호랑이의 에너지 역시 다른 존재에게 물리학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호랑이는 신성과 범접할 수 없는 위엄, 그리고 무시무시한 공포의 에너지를

내재화한 동물이다. 호랑이가 없는 세계와 있는 세계는 다르다. 호랑이는 우리의 사고와 감정, 욕망과

충동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내면의 실체에 영향을 미친다. 저 불굴의 용맹성으로 도약하는 호랑이가

없는 세계에서 사람 내면에 있던 신성한 본성은 희미해지고 삶의 피상성은 커진다.

호랑이는 온갖 산짐승들의 으뜸이다. 나는 금수의 제왕답게 무리 짓지 않는 호랑이가 좋다. 개는

무리로 움직이지만 호랑이는 혼자 다닌다. 무리의 힘에 기대 제 능력보다 으스대는 짓들은 나약한 자

들이 저지르는 병폐다. “폐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빨아들인다 / 내 핏속에 / 야생의 호랑이는 살아 있

다 // 나 도무지 살뜰하지 못해 / 나쁜 음식과 잘못된 습관으로 / 소년과 숨가뿐 청춘 시절을 지나왔

다 / 게으름과 잡식에도 불구하고 호랑이는 살아 있다 / 내 핏속의 호랑이는 / 가끔은 영감과 상상을

낳는다 // 거친 수풀을 헤치고 / 심연의 하늘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며 / 야생 호랑이는 / 검은 돛배

보다 튼튼한 두 다리로 달린다 // 몸은 고이 모셔두고 건사하는 것이 아니라 / 필요한 일에 아낌없이

쓰는 것 / 야생 호랑이는 / 곤핍한 마흔 줄의 아침에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으니 / 그가 비겁한 짐승을

쓰러뜨려 살을 찢을 때 / 진동하는 향긋한 피 냄새를 맡고 / 나는 포효를 한다”(졸시 ‘내 핏속의 야생

호랑이’ 시집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세계사, 2001)

우리는 날램과 용맹함의 표상을 잃어버린 시대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호랑이가 사라지니 간사한

여우와 잔꾀가 능한 원숭이들이 판치고, 비겁과 용렬함이 정화되지 않는 폐단이 있다. 어떤 민담에서

호랑이는 욕심이 사납고 어리석은 짐승이다. 전래동화 <호랑이와 곶감>에서는 어수룩한 동물이다. 그

러나 호랑이는 사귀邪鬼와 병귀病鬼를 막는다. 그 성질은 어질고 기세는 용맹스러운 금수의 제왕이다.

박지원은 <호질>에서 “범은 착하고도 성스럽고, 문채롭고도 싸움 잘하고, 인자하면서도 효성스럽고,

슬기롭고도 어질고, 엉큼하면서도 날래고, 세차고도 사납기가 그야말로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고

쓴다.

바라건대 호랑이 해에는 흉사는 없고 좋은 일만 많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날램과 용맹함의 표상을 잃어버린 시대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호랑이가 사라지니 간사한 여우와 잔꾀가 능한 원숭이들이 판치고, 비겁과 용렬함이 정화되지 않는 폐단이 있다.

안성 복거마을

안성시내에서금광면방면버스를타면

20분정도걸린다.

승용차를이용할경우,내비게이션주소

검색에서‘경기도안성시금광면신양복

리295’를입력하면쉽게찾아갈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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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가기 혹은 다시 시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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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는 모두에게 찾아온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잘 쌓아온 이에게도,

잠시 방황하며 들쭉날쭉 쌓아온 이에게도 똑같이 찾아온다. 누군가는 계속 이어갈

것이고, 누군가는 다시 시작할 것이다. 새해라는 소중한 이정표가 있고,

‘새날’이라는 두둑한 밑천이 있으니, 배짱 두둑하게 ‘경인년’을 살아보자.

10 2010 no.08 11

특 집 _ 제 야 에 서 새 해 로 이 어 지 는 풍 경

시간의 매듭을 푸는 종소리

글윤여빈_경기문화재연구원|사진이한구

한 해가 닫히고 새해가 열리는 시간,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종을 칩니다.

종소리는 사악함을 물리치고 기쁜 일을 맞이하는 상징,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한 해의 끝과 시작의 경계에서 시간의 매듭을 푸는 종소리에는

낡은 것이 물러나고 새것이 도래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치느냐에 따라 그 메시지는 다르게 들립니다.

근심이 있는 사람이 치면 슬프게 울리지만,

평안한 사람이 치면 맑게 울립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치면 종소리도 진실 되게 울릴 것입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아득한 맥脈놀이를 통해

평화를 향한 간절한 소망이 천상과 지상에 멀리 멀리 퍼지기를 기원합니다.

종소리가울려퍼진다.해가완전히바뀐것을실감한다.새해소망하는것들이이루어질수있도록도와달라고기도한다.가족의건강을바라고,승진을바라고,부자가되기를바란다.사랑

하는사람과함께살기위한바람들이다.통일을염원한이들도그러한바람일것이다.파주임진각‘평화의종’은그런바람을담아,북방한계선저너머까지울려퍼진다.

12 2010 no.08 13

특 집 _ 마 을 공 동 체 의 기 풍 의례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휘영청 밝은 달빛처럼글편집부|자문김종대_중앙대학교민속학과교수|사진안홍범

우리에게 잘산다는 것은 잘 먹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 많이 먹기 위해 논두렁과 밭두렁을 태우고, 거름을 뿌리고, 잡초를 뽑았다.온 힘을 다 바쳐도 하늘의 뜻이 아닐 때는 흉작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하늘의 뜻이 풍작에 기울도록 빌고 또 빈다. 농작물이 불꽃처럼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대보름날 달집을 크게, 크게 태운다.

새해가 되면 마을에서는 농사의 풍년과 일 년 내내 좋은 일만 있

기를 기원하는 기풍의례祈豊儀禮를 행했다. 농경시대에 풍작과 흉

작은 공동체의 생사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일이었다. 기근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아지면 다음 해 농사를 지을 노동력을 상실하

게 되어 공동체 전체가 큰 곤경에 빠지기 때문이다. 개인의 안녕은

마을 공동체의 안위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함께 모여 풍년을 기원

하는 지신밟기와 달집태우기를 비롯해 산신제와 장승제 등의 마

을 공동체 의례 문화가 발달했다. 경기도 광주의 ‘해동화 놀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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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기풍의례의 하나이다.

불은 정화다, 그리고 풍요다

해동화 놀이는 소나무의 생가지 등을 묶어 집채처럼 쌓고 불을 질

러 태우는 달집태우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 달집태우기는 주로 충

남 이남의 산간 지역과 호남 동부 산간 지방에서 전승된다는 점에

서 밭 중심의 농경 의례적인 속성이 강하다. 그렇다면 해동화 놀이

는 달집태우기와 어떻게 다를까.

외형적으로는 나뭇단의 높이와 수가 다르다. 해동화 놀이는 봉

화의 높이를 거대하게 세운다. 보통 7~10미터 정도로 세우는데,

예전에는 20여 미터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대개 달집태우기는 봉

화를 한 개 세우지만, 해동화 놀이는 두 개의 봉화를 세운다. 신랑

과 색시,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 남녀로 짝을 이뤄 음양의 조화를

맞추고자 한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그렇다면 ‘해동화’라는 명칭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이

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광주시 중부면의 광지원리光池院里에서는 ‘동네의 화를 풀어

버린다’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정화淨化의 상징을 지닌 불이 재난

을 방지해서 마을의 안녕을 지켜줄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겨우내

얼었던 것을 녹인다는 의미에서 ‘해동화解凍火’라고 부른다는 설

도 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녹인다는 것 역시 농사의 시작과 관

련 있다.

그러나 ‘해+동화洞火’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해석이 아닐까

싶다. ‘해’는 나뭇단을 의미하는데, 이 해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 달

집이기 때문이다. 광주 신원 3리에서는 이 달집을 칡으로 묶는데,

가구 수만큼 돌려 묶는다. 각 가정이 평안해야 마을 전체의 액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광지원리의 경우 유래담으로 마

을에 우환이 생겼을 때 신령님이 나타나 달집태우기를 하라고 해

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닌다.

달은 여성의 생산을 상징한다

농사의 시기와 ‘달’의 주기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풍의례

는 주로 보름에 행한다. 한강을 경계로 경기 북부 지역에서는 주로

10월에, 안성이나 광주, 평택 등의 남쪽 지역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지낸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달의 정기를

듬뿍 받아 한 해 농사가 풍년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달의 변화는 일정하게 반복된다. 크기가 점점 작아지며 사라

질 듯 보였던 달이, 다시 점점 커지는 모습을 사람들은 일종의 부

경기도광주에서는해동화놀이를통해마을의우환을불태우고,풍요를기원했다.각가정

에서나뭇단을걷어,7미터높이의봉화를만들고정월에불을질렀다.불길이활활잘타오

를수록풍년이든다고생각했다.

활로 생각했다. 그래서 달이 영생을 상징하게 되고, 믿음의 대상이

된 것이다. 또한 달은 여성들의 달거리를 관장하는 여성신으로, 생

산력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생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달의 기운을 받아야 했다. 이 같은 달의 상징성 때문에 새해 첫 만

월이 떠오르는 정월 대보름날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전라도 평야 지방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집중적으로 당산제나

동신제를 지낸다. 쌀농사 문화권의 특징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마을 제사에는 항상 집단 놀이가 벌어진다는 점이다. 광주의

고싸움놀이, 안동의 차전놀이 등과 같은 집단적인 편싸움 놀이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집단 편싸움 놀이로 마을 구성원의 단합을 꾀

했으며, 승패의 결과로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이긴 마을에 풍년이

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다들 놀이를 싸움처럼 격렬하게 했다.

그만큼 풍년에 대한 기원이 간절했던 것이다. 신을 위해서 제사를

올리고 어느 마을의 제사를 더 흡족하게 받았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놀이로 표현되었다.

광주에서도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는 마을이 있는데, 여자

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이 역시 여성의 생산 능력에 기댄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다.

전통을 잇는 힘은 공동체의 결속력에서 나온다

특히, 정월 대보름에 행하는 다양한 제의와 행사는 풍요에 대한 기

원이라는 중요한 목적이 있었기에 비교적 잘 전승되어왔다. 또, 이

러한 제의와 행사는 마을민이라는 사회구성원을 하나로 묶기 위

한 장치로서 적절히 작용했다. 농기계가 없었던 시절, 농사는 혼자

서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협업은 너무나 중요했다.

최근 이런 민속 의례가 제의적 신성성은 사라지고, 연희만이

남은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안타깝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제 농사에서 다른 이의 손길이 예전만큼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

다. 집단의 힘이나 협동이 필요한 경우가 많지 않은 것이다.

농촌도 도시처럼 개인화되어가고 있다. 이런 경향은 가속화될

것이다. 사람처럼 사는 사회,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마을 공동체 의례 문화가 살아 있어야 한다. ‘해

동화’ 처럼, 활활 타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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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_ 새 해 를 맞 이 하 는 종 가 의 긴 하 루

누대의 시간이 종부의 행주치마 위로 흐른다

실학자 서계 박세당의 후손답게 서계 종가는 검소하게 새해를 맞이한다. 특별한 것이 없어 보여줄 것도 없다는 종부의 말에서는 겸손이 묻어난다. 특별한 것이 있어 지켜온 것이 아니라, 줄곧 지켜왔기에 특별해진 서계 종가의 새해맞이 풍경을 함께 살펴보자.

글김서령_칼럼니스트|사진이한구

종가에서 설은 곧 제사다. 서계 종부 김인순 씨(57세)의 새해맞이

준비는 놋 제기를 닦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를 물린 놋 제기는 아

무리 시간이 흘러도 행주로 몇 번 훔치면 우아하면서도 고졸한 윤

기가 되살아난다. 11대를 봉사한 이 집은 정월 초하루 말고도 섣달

그믐날 저녁에 묵은 제사를 올리고 있다.

“어머님 돌아가신 후에는 간소화해 묵은 제사에는 떡국을 올

리지 않고, 설날 아침에 떡국 여덟 그릇을 떠 한 대씩 제사를 네 번

지내요. 그래서 30년 동안 늘 퉁퉁 불은 떡국만 먹었어요.” 그래도

불만은 없다. ‘아무개 엄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종부’로 사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18 2010 no.08 19

새해맞이의 분주함이 정겨운 섣달 그믐날

섣달 그믐날에는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 후, 대문 앞에 체를 거

꾸로 걸어둔다. 악귀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악귀는

체를 보면 구멍 수를 일일이 세어보는 습성이 있어서 집에 못 들어

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믐날 1년 동안 쓸 조리를 한꺼번에 구입했어요. 한데 묶어

방 귀퉁이나 부엌에 돈과 엿을 넣어 매달아뒀어요. 그걸로 우리 문

중 전체가 새해 복을 듬뿍 받기를 빌었던 거예요.”

그믐날 밤에는 방, 마루, 부엌, 광, 변소, 마구간 등 집 안 구석구

석에 식구 수만큼 등불을 걸어 환하게 밝혔다. 새해를 신성하게 맞

이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서계 종가에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묵은

세배’를 드린 후 설날 아침에 세배를 하고 있다. 한 해를 새로 맞이

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한 해를 무탈하게 마감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면서 아이들

을 못 자게 해요. 모처럼 만난 사촌, 육촌들과 즐겁게 놀라고 꾸며

낸 말이지요. 새 옷을 입은 아이들이 시끌벅적 웃고 떠들면 정말

명절다워요. 집 안 전체에 훈김이 가득해지는 느낌이라 좋아요.”

종부의 바지런함이 종가를 지켜낸다

종가를 구성하는 요건으로 대개 다음을 들 수 있다. 조상 중 누구

나 알 만한 훌륭한 인물이 있어야 하고, 그분의 위패를 모시는 ‘사

당’과 그 사당을 지키는 후손이 사는 ‘종택’ 그리고 사당 수호를 전

담할 직계후손으로 이어져온 ‘종손’과 ‘종부’가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종가의 여러 요소 가운데 그저 하나였겠지만, 오늘날

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종가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종부’일 것이다. 종부가 사당과 종택과 조상을 외면해버리면 아무

리 삼정승 육판서가 나온 집안이라도 종가는 풀이 죽어 쓸쓸해지

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 눈엔 서계 종가의 오래 묵은 마룻장에서

도는 윤기가 더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종부는 어느새

빻아왔는지 수수가루를 반죽해 번철을 펴놓고 수수부꾸미를 부

쳤다. 명절에 손님이 오면 흔히 내놓는 음식이라고 한다. 반죽을 뚝

뚝 떼서 능란하고 재빠르게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는 품이 예사 부

인들과는 전혀 다르다. 과연 종손, 종부는 하늘이 내나 보다.

종가에서설은곧제사다.서계종가의제례상은실학

자의후손답게소박하고정갈하다.잡채와편육이제

상에오르는것이특징이다.이유는잘모른다.그저

시어머니의방식과솜씨를그대로따르고있을뿐이

다.대를물린놋제기는세월이지날수록더멋스러

워진다.

“필, 사, 원, 종, 수, 재, 양, 승, 서, 찬, 이렇게 열 분에 돌아가신 아

버님까지. 내외분 기제사와 설, 추석, 차사 그리고 시월에 지내는

시제, 사당 제사를 아직 다 그대로 지내고 있어요.”

종부는 부꾸미를 부치면서 손가락으로 조상의 항렬을 꼽는다.

조상, 사당, 종택이 하드웨어라면, 종손과 종부에 지손枝孫(원줄기

에서 가지처럼 뻗어 내려간 후손)과 문중이란 소프트웨어가 있어

야 진짜 종가라 할 수 있다. 서계 종가는 그러한 종가의 요건을 모

조리 갖추었다. 박세당이란 조선 중기의 대학자가 있고, 위패를 모

시는 사당이 있고, 종손 내외가 종택에 살고 있으며, 주변에 지손

들과 반남 박씨 문중이 있다.

무엇보다 청빈과 겸허가 중요하다

서계 박세당(1629~1703)은 장원급제한 수재였다. 홍문관 교리, 이

조좌랑 등에 임명됐으나 벼슬에 뜻이 없고 자연에 묻혀 글 읽는

것을 좋아했다. 17세기 중엽 조정은 노·소론의 당쟁이 유독 치열

했다. 서계는 그런 다툼이 싫었던 모양이다. 마흔에 벼슬을 접고

양주 수락산 기슭(현재 서계 종가 위치)에 은거했다. 농민을 위해

농사 기술에 관한 <색경>을 쓰고, 성리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

사변록>를 지었다. 조정이 예조판서, 이조판서, 중추부사를 제수하

며 암만 불러내도 끝내 나가지 않았다.

서계 종가가 아직 제 모습을 유지하는 큰 이유가 나는 그 어름

어디쯤에 있다고 짐작한다. 조선 사회는 벼슬 없이 글만 읽는 사

람을 처사라고 불렀다. 처사란 재야 학자이고 재야 학자는 세인에

게 벼슬아치보다 존경을 더 많이 받았다. 벼슬길을 외면하고 초야

에 묻혀 글을 읽었다는 것은 자손 교육과 집필에 전념할 수 있었

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가문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백 년 거듭된 물걸레질로 윤이 도는 마루에 걸터앉는

다. 정면에 우뚝 솟은 도봉산을 본다. 장엄하지만 사람을 압도하지

는 않는 기상이다. 뒤는 수락산, 곁엔 개울이 흐른다. 귀 기울이니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 개울의 이름이 바로 서계西溪다.

이 터에 자리 잡은 서계의 안목과 도봉도 수락도 아닌 자그만

개울의 이름을 따 자호를 삼은 겸허, 앵두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심

고 초가를 지은 청빈이 맑은 바람처럼 쇄락하게 내 가슴을 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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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무대 <산> 제공 극단 <얼굴과 얼굴> 제공

명절에손님이오면보통수수부꾸미를내놓는다.수수부꾸미는소금간을한팥이뜨거울때손

가락크기만한소를만든후수수가루를동글납작하게빚어번철에지지다가한쪽이익으면뒤집

어팥소를넣고반으로접어가장자리를꼭꼭눌러붙인지진떡이다.

뒤는수락산,앞은도봉산,곁은개울이흐른다.그보다더좋은것은너른마당에400년된은행나무가있다는것이다.은행이한해예닐곱가마니정도나온다.잎이떨어지는것도장관이다.

지나간다. 사랑채 왼편에는 한 칸 남짓한 누마루가 붙어 있다. 그

자리에 분합문을 위로 접어 올리고 앉으면 도봉의 연봉連峯이 그

대로 이 집의 안마당이 된다. 오른쪽 시야를 가리는 고층아파트 단

지는 곁으로 슬쩍 밀어내고 싶지만 그 또한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인

연으로 거기 앉았을 것이다.

지금 서계 종가엔 네 식구가 살고 있다. 서계 11대 종손이던 박

찬호 옹이 타계하고 이젠 여느 홑집들처럼 핵가족이 됐다. 종손 종

부에겐 아들만 둘 있다. 나중 장성한 아들에게 종가의 모든 것을

물려줄 것인지 궁금했다. 오랜 고민 끝에 종택과 인근 땅 3000평

으로 <서계문화재단>을 만들어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단다. “우리

뜰에서 문화 행사를 많이 벌였으면 좋겠어요. 얼마든지 개방할 준

비가 돼 있습니다.”

설날은 모든 이에게 공평한, 그리고 특별한 날이다

설이다. 낡은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온다.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우리가 태초의 신성한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설의 풍습들

은 그런 초시간성을 음식과 입성과 놀이로 구체화하는 의식이다.

묵은 세배를 올리고 묵은 제사를 지내면서 그믐을 보낸 후 집

둘레에 환하게 붉을 밝히고 새해 첫 새벽을 맞는다. 서계 종가에

선 그 밤에 집안 여인들이 모여 희고 길쭉한 가래떡을 썬다. 내일

입을 서방님들의 도포를 손질하고 아이들의 설빔을 손질하느라

쉴 틈이 없다. 온 가문이 순백의 흰떡같이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

음이 담겨 있다. 제기는 스테인리스스틸 1벌, 목제기 1벌이 따로 있

지만 설에는 특별히 유기를 꺼내 쓴다. 일 년 중 최고 명절인 설이

아닌가.

세배는 동항끼리는 서로 맞절하고 아래 항렬에게는 절을 받는

다. 절 받은 후엔 후손들에게 적절한 덕담 한 마디씩을 내려준다.

제사도 지내고, 세배도 드리고, 덕담도 나누고, 떡국도 먹은 후에

는 모두 마당에 나와 윷놀이를 한다. 윷말을 쓰며 크게 웃는 소리

에 집 안 구석구석 숨어 있었던 악귀들이 모조리 달아난다. 윷놀

이에서 모를 치고 난 후 기쁨에 덩실거릴 때 마시라고 종부는 집에

서 담근 술 한 동이를 사랑마루에 미리 내놓았다. 그럴 때 반남 박

씨 문중 사람들의 얼굴은 꽃이 핀 것처럼 환하다. 서계 할아버지도

도봉산 저 너머에서 빙긋이 웃으시며 윷판을 기웃대신다.

22 2010 no.08 23

특 집 _ 경 기 도 사 람 들의 새 해 맞 이

好好好, 福福福

정초에는 복조리에 돈을 넣고 복을 빌었다. 또 액을 막기 위해 연을 날렸고, 달집에 옷의 동정이나 저고리를 넣어 함께 태웠다. 이런 풍습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어르신과,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으로만 아는 어린이, 그리고 이색적으로 받아들이는 다문화 가정의 주부를 만났다. 새해맞이 형식은 다르지만 좋은 한 해가 되길 바라는 마음만은 같은 그들 모두에게 웃음과 복이 가득하기를.

글김수정,강혜란_경기문화재단문화홍보팀|사진대진대학교박물관제공

식구들이 배곯지 않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랐던 어르신의 설날

많은 추억을 간직한 이들을 만나기 위해 화성시 노인복지회관을

찾았다. 2층 강당에서는 20여 명의 ‘실버무지개 극단’ 단원들이 연

습 중이었다. 이들은 2010년 여름 공연을 2009년 겨울부터 준비하

고 있다.

“어릴 때보다 지금이 살기 좋지만, 그래도 옛날 생각하면 재미

있어요. 그때는 정초에 거지 분장을 하고 밤늦게까지 이웃집을 돌

며 밥을 훔쳐 먹었어요.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는 일부러 밥을 남겨

놓았지만, 대부분이 없는 살림이라 서너 집은 돌아야 배를 채울

수 있었어요.”

극단에서 비교적 어린 편인 오선자(67세) 씨는, “당시 동네에서

결혼하는 사람의 둘 중 하나는 그날 밤에 만난 인연”이라고 말하

며 웃는다. 늦은 밤 처녀, 총각이 만나니 눈이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 젊은이들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었으리라. 젊은이 못지않

게 복조리 장수도 정초를 기다렸단다. 당시에는 ‘새해 행운을 조리

로 일어 취한다’는 뜻에서 집집마다 복조리를 벽에 걸어두고 복을

기원했다. 초하루 전날 밤부터 골목을 돌아다니며 팔았는데, 새해

가 얼마 안 남은 시각에는 돈을 받지 않고 집 안쪽으로 조리를 휙

던지기도 했다. 조리 장수는 다른 사람과 복을 나눠서 기분 좋고,

받은 사람은 뜻밖의 선물이라 기분 좋아했다. 나눌 수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기꺼이 나눴던 시절의 새해 풍경이다.

지금은 직계가족만 모이는데도 복잡하고 힘들다며 더 간소하

게 명절을 보내려고 하지만, 50여 년 전만 해도 피가 한 방울만 섞

여도 함께 모여 새해를 보냈다. 그런 북적거림은 이제 특별한 종가

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이 됐다. 힘든 일이 사라진 만큼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없어 섭섭하다. 그러나 자식들이 찾아오는 설날은 여

전히 기다려지는 특별한 날이다.

옛것에 새것을 더해 전통을 만들어나갈 아이의 설날

한 일보다 해볼 일이 많아 하루하루가 마냥 즐겁고 내일이 기다려

진다는 용인 마북초등학교 민수현(12세) 어린이다. 친구들을 좋아

해서 차례상에 절을 하면서도 친구를 많이 사귀게 해달라고 빌었

다는데, 2009년엔 많은 친구가 아니라 깊이 있는 친구 한 명을 얻

었다. 그 친구를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지만, 친구 욕심이 많은

수현이는 아무래도 아쉬운 모양이다. 그래서 5학년이 되면 새로운

친구들을 더 많이 사귈 생각이다.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수현이의

비법은 ‘대화’를 많이 하고, 취미를 공유하는 것.

음악과 만화 그리기, 그리고 동물을 좋아하는 수현이는 올해

기타를 배울 계획이어서 벌써부터 설렌다. 고등학생이 되면 밴드

부에 들어가고, 어른이 되면 기타 치는 보컬리스트이면서 만화도

그리는 멋진 사람이 될 거란다. 그런 수현이에게 기타 배우기는 그

꿈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인 셈이다.

수현이는 세배보다는 세뱃돈에 더 관심이 많고, 명절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휴일에 더 많은 의미를 두는 것이 싫다고 했다. 설날이

되면 수현이네는 옛 방식을 고수하며 온 친척이 모여 차례를 지낸

다. 그런데 수현이는 여자들만 힘들게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이 좋

아 보이지 않는다. 남자들도 함께 도운다면 모두가 더 즐거운 새해

가 되지 않겠느냐고 부드럽게 지적한다. 이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

어 맞는 새해에는 ‘명절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것 같다.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다문화 가족의 설날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고, 함께 있을 때는 공감하는 것. 이

는 인간살이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모습도 마찬

가지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복을 기원하고, 한 해 운

세를 점친다.

“한국에서 보낸 첫 설날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힘들었

어요. 새벽에 차례상을 준비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몰라서 시어머

니 혼자 다 하셨어요. 지금은 알아서 척척 하지만, 전이나 부침개

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걸려요.”

한국 사람과 결혼해 한국식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있는 오쿠다

토모코 씨(43세)에게 ‘차례상’은 더 이상 낯선 문화가 아니다. 일

본에서는 매일 조상에게 새로 지은 밥과 물을 올리고 절하기 때문

에 명절이라고 해서 특별히 상을 차려 올리지 않는다. 연휴에 먹는

‘오세치’(우엉, 연근, 새우, 다시마, 검은 콩, 무 등을 달착지근하게

조리하는 요리)를 한꺼번에 만들어놓고 여자들도 설 연휴에는 편

하게 쉰다. 이에 비하면 한국식 새해맞이는 무척 고되다. 그런데도

가족과 친척이 함께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좋다고 말

하는 걸 보니 토모코 씨도 한국 며느리가 다 된 듯싶다.

차례상에 올라갈 음식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음식 장만은 이

제 그다지 힘들지 않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전라도 사투리는 아직

도 잘 못 알아듣는데, 적당히 웃으면서 눈치껏 넘길 정도의 요령도

생겼다.

그는 ‘수원 다문화가정센터’를 찾는 결혼 이주민에게 한국 문

화를 가르쳐주고 있다. 한국에서 보낸 이십 년 세월의 힘이다. 집안

에서도 문화 교류는 끊임없다. 오쿠다 토모코 씨 덕분에 한국과 일

본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24 2010 no.08 25

백남준아트센터가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의 첫 수상자로 이승택을 뽑았을 때,그건 사건이었다. 저승의 백남준도, 본인 이승택도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랄까.2009년 11월 28일부터 2010년 2월 28일까지 전시되고 있는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전에 나온 그의 작품들로, 이승택은 늙지 않는 세상의 반항아, 꺾일 줄 모르는 한국 미술계의 최전방 현역으로서 또 하나의 선언문을 관람객에 던지고 있었다.-이글은2009년11월28일〈백남준아트센터국제예술상>시상식전에한번,그리고2009년12월1일서울마포구연남동자택에서다시한번한인터뷰내용을합해서요약한것이다.

인터뷰정재숙_<중앙일보>문화부기자|사진이한구

세상을 거슬러 오른 게 내 예술이다

스 페 셜 인 터 뷰 _ 설 치미 술 가 이 승 택

26 2010 no.08 27

정재숙‘사자머리’날리시던기력은여전하시네요.〈백남준아트센터국

제예술상>수상을축하드립니다.오랜만에선생님옛날작품을만나니

참좋습니다.

이승택 이렇게 보여줄 수 있어 다행입니다. 작품이 내 몸과 같이 늙

지 않는다는 게 고마워요. 평생 상하고는 인연이 없었고 상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아니 오히려 걷어차고 살았는데 이렇게 큰 상

을 주니 영광입니다.

정재숙백남준아트센터가첫수상자를고르는데고심했다고들었습니

다.아마도백남준선생의전위정신과도전·도발의식이이승택예술과

통한다고본것아닐까요.

이승택 내 방식대로 끊임없이 새로운 걸 추구해왔습니다. 그런 점

이 백남준 선생에게 탯줄을 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살아온

노선과 방법이 다르고 활동 무대 또한 그는 국외파고 나는 국내파

지만 실험과 도전이란 점에선 공통점이 있을 겁니다.

난 끼리끼리 코드를 이뤄 협잡하는 한국 사회에서 아웃사이더

이자 이단아로 살아왔지요. 이번에 내게 상을 주는 걸 보고 우리

나라 문화에 진실이랄까, 정의가 살아 있구나 하고 안도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영철 관장이 참 고마워요. 정치적 관점에서의 수상

자 선정이 훨씬 쉬웠을 텐데 그걸 물리치고 나를 뽑아줘서.

내 사전에 재탕이란 없다

정재숙세상과타협하길거부하는선생님작품의근본은무엇일까요.

이승택 내가 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쳤습니다. 미술의 역사를 보

면 위대한 작가는 전부 앞 세대가 일군 성과를 뒤엎습니다. 대가의

업적은 그대로 남긴 채 새 세대는 새롭게 시작합니다. 난 그 원리를

일찌감치 알아챘죠. 일종의 부정否定 전략이랄까요. 대부분 작가

들이 외국에서 유행하는 사조나 방법에 ‘와’ 하고 몰려가지만 난

거기에 휩쓸리지 않았어요. 차라리 뒤돌아섰죠. 부화뇌동하는 자

들과 반대편에 서서 조용히 바라보면 훨씬 더 내게 득이 되더란 말

입니다.

내 사전에 재탕이란 없습니다. 후배들에게 늘 말하죠. 작가는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작품이 항상 바뀌어야 하는데, 미

술시장에서 잘 팔리는 히트 상품이 나오면 대부분 그걸 평생 베껴

먹고 산다. 역량이 부족해 변화하지 못하면 죽은 작가다.

정재숙매순간변하려면얼마나긴장하고살아야할까요.그에너지가부

럽습니다.

이승택 ‘새로운 걸 보여주겠다’는 마음보다는 내가 좋아서 했다

는 표현이 더 맞을 겁니다. 이를테면 <바람> 연작을 만들 때는 내

가 내 작품에 취해서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요. 난 즐거움을 찾아

헤맸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제가 1989년 장흥 토탈미술관에서 했던

분신 행위 예술 선언문이 딱 그 마음을 표현한 겁니다.

내 스스로가 / 즐거움을 얻기 위해 / 사람이 있건 없건 / 깊은 산

이나 들에서 / 내가 하고 싶은 것을 / 나는 오래전부터 해왔다. /

이번에도 / 관객을 무시하고 / 기존의 구조물과 설치 / 그림과 오

브제들 / 매일 하나씩 십오일간 / 현장에서 제작하고 나서 / 불 태

워 없애는 / 분신행위 예술을 / 장흥의 토탈미술관 야외에서 / 극

소수의 뜻있는 전문가와 / 나를 위해 실험 행위 한다.

정재숙그렇게말씀하시지만누구보다이론공부를열심히하는분으로

알려져있는데요.

이승택 난 손재주를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렁설렁

했다는 건 아닙니다. 그 바탕엔 깊은 생각이 있어요. 철학을 공부

하고 우주를 거닐었죠. 작품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현

대예술은 고도의 지적인 놀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어요. 역사와 인

문학을 파고들며 균형을 맞추는 데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손재주

보다 정신적 논리 무장이 더 중요함을 알아서였죠. 역사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욕심도 있었습니다. 야심이랄까. 반드시 미술사에

살아남는 작품만을 제작해보려고 했죠. ‘세상은 나로부터 시작한

다’는 집념으로 묵묵히 일해왔습니다.

정재숙이번전시작은선생님작품중에서비교적초기작중심으로꾸며

졌는데요.

이승택 작품을 선정한 백남준아트센터의 학예연구실장 토비아스

버거가 자꾸 옛날 것만 골라서 내가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솔직히

백인우월주의 시각으로 동양적인 것을 낮춰보는 것이 아닌가 싶

어 불쾌했고요. 그런데 그 사람 말이 이런 작품은 유럽에서도 볼

수 없는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독창적인 것을 했으니 꼭 보여주고

싶다는 거예요.

정재숙젊은후배들작품도가끔보러다니십니까.

이승택 옛 기무사 터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주최로 열린 <신호탄>전

에 제 작품도 출품했지요. 다들 그럴듯해 보이지만 서구 미술 어

디엔가 있는 거예요. 자기만의 목소리가 없어요. 제일 나이가 많

은 나보다도 작품들이 더 늙었어요. 작가가 독자적인 세계를 가져

야지, 젊은 애들이 왜 그럴까 싶어요.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

들이 어디엔가 옴짝달싹 못하게 묶여 있지 않나 싶어요. 말하자면

‘치사’한 게 작품에 보인다고나 할까.

정재숙그들을치사하게만든원인이뭘까요.

이승택 서투른 지도자라 할 수 있겠지요. 세련되고 깨끗한 것만 찾

는 관람객, 그런 걸 자꾸 팔아야 하는 화랑 주인들, 거기에 한통속

이 돼서 ‘그런 것이 미술이다’라고 오도해버리는 대학교수와 평론

가, 이 모두가 서투르기 그지없는 작가들의 지도자란 말입니다. 그

들이 부추기는 쪽으로 좇아가는 작가들이 더 큰 문제지만요.

정재숙한국현대미술이그런지도자들때문에망했다는말씀이군요.

이승택 난 그래서 그런 이들을 보면 ‘당신 누구요’ 하면서 무시해버

립니다. 내가 낼 모레면 팔십이오(이승택 선생은 1932년생이다). 한

국 추상미술 1세대지. 그동안 흘러온 문화 구조를 다 꿰고 있어요.

1945년 해방이 되고 50년에 6·25가 터지니 그런 극심한 혼란기에

날뛰며 잘나가는 건 사기꾼들이더군. 그렇게 사기를 치다가 1970

년대 들어 모방의 시대가 오니 누가 먼저 베끼느냐 난리들이었죠.

인터넷이 발달하고 미술 정보를 누구나 볼 수 있게 되니 그동안 남

의 걸 제 것처럼 해온 게 들통이 나게 생겼거든. 그 가짜를 진짜로

바람 시리즈, 1970

작가의비물질화작업중에서가장많이언급되는것이이바람시리즈다.“있는것보다는

없는것,보이는것보다는보이지않는것에대한존재론적인관심에중심을두었”던이승택

은눈으로는볼수없는공기의흐름을나부끼는원색의천을통해시각화했다.사진_작가 제공

28 2010 no.08 29

만들려니 집단 이기주의가 필요했겠죠. 그게 ‘코드 사회’인 겁니다.

난 거기서 벗어나서 홀로 견뎌왔고.

세상을 역행하면 저절로 예술이 보인다

정재숙시상식장에서수상소감대신자작시를낭송하셨는데요.선생님

작품처럼강렬했습니다.작업하는마음,생의태도를응축하고있다고나

할까요.한번읊어주시겠습니까.

이승택 하나둘 세기도 힘든 80인데 / 내 마음 30은 어느새 80이라

니 기氣가 차다 / 그래도 팔팔한 청년靑年 수명이 80이라니 / 아

직 100은 어림없고 / 힘들게 너무 오래 살았고 서러울까 / 아무것

도 해놓은 게 없어도 유별나게 / 독설과 야유, 아이러니와 패러독

스를 뿔이며 / 마음것 사람답게 살려고 햇지 / 헌데 재수 없이 궐

력 더러운 선후배 놈들에게 / 힘들게 무던이도 당해 골탕 먹었지 /

남다른 내 재주 몽땅 사기당하고 / 왕따 헌신짝 신세가 되기도 했

지만 / 얼간이 기성세대의 왕따가 별것 아님을 알았고 / 오히려 나

의 오기를 강하게 해주었으며 / 세상 밖에서 모든 것을 거꾸로 살

라하더라 / 해서 나는 세상을 꺼꾸로 보고 / 거꾸로 생각하고 꺼

꾸로 살았지(원문에는 거꾸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ㄱ을 세 개

씩 표기했다.) / 80이 돼서야 겨우 생生을 짐작했지만 / 세상을 역

행逆行하면 저절로 예술이 보이고 생겨났지 / 허나 평생平生 고되

게 찾던 예술도 별것 아니고 / 인생人生도 그렇구 그런 만화경 속

에 놀아나 / 10년이며 내일이요 그때 나는 90인데 / 노망 90을 어

떻게 허풍虛風만 떨겠는가. / 어지러운 내일을 모르는 시들한 희열

喜悅의 생生에.(맞춤법에 어긋나는 단어도 있으나 작가가 알고 있

으면서도 일부러 사용한 것이므로 그대로 두었다.-편집자 주)

정재숙그러니까결국‘거꾸로’라는한마디가선생님예술세계의고갱이

라할수있겠군요.

이승택 예술은 비틀어야 의미가 있죠. 그게 아니면 뭔 재미가 있겠

어요. 이 돌 작품을 보세요. 돌을 줄로 묶어 움푹 들어간 자국이

난 걸 창조했죠. 딱딱하고 무거운 돌을 물렁물렁하고 가벼운 물질

로 바꾼 겁니다. 개념미술이 성할 때 자연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었어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은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었지요.

모두 거기에 경배할 때 저는 그걸 거부했습니다.

한번은 일본에서 국제조각심포지엄이 열렸는데 일본 평론가

들이 전부 미술은 자연에 스며들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겁니다. 그

래서 제가 한마디 해줬죠. 지금 일본 미술이 좀 처진 것 같은데 평

론가들이 자연의 절대성을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미술가들이 상

상력을 말살당한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고요. 다들 깜짝 놀라더

군요.

정재숙선생님댁에와서‘악!’소리가절로나왔습니다.이방문을열어

도작품이가득,저방문을열어도작품이가득,지하주차장과창고부터

2층베란다구석구석,복도여기저기에작품이차곡차곡쟁여있습니다.

집전체가미술관인셈입니다.

이승택 하하하, 내가 욕심 많은 깐깐한 영감입니다. 지금도 아침부

터 저녁까지 창조의 샘이 퐁퐁 솟아요. 이렇게 건강을 유지하고 늘

작품 생각만 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내조해준 아내를 난 ‘나의 하

느님’이라고 부르죠.

정재숙이번전시에서‘털달린캔버스’란작품을보고많이웃었습니다.

털을즐겨쓰시던데요.

이승택 고암 이응로(1904~1989) 선생과 남관(1911~1990) 선생이

서체 실험을 할 때였어요. 그분들 작품을 들여다보다가 내가 무릎

을 쳤죠. 그럼 난 머리카락으로 서체 실험을 해야겠다. 원래 내가

영화감독 지망생이었어요. 그래서 한때 충무로를 기웃거리기도 했

죠. 거기 천하의 사기꾼들이 다 모여 있는데 사람들이 재미있었어

요. 한번은 친구 하나가 일본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영화를 찍었

죠. 배우들이 사무라이 머리 분장을 하느라 머리카락이 많이 필요

했어요. 그때 작품에 쓰려고 얻어둔 걸 두고두고 잘 썼어요.

정재숙선생님이재료로선택하시는건정말상상을초월하는데요.이를

테면바람·연기·불·물·안개등비물질적인것도많고요.

이승택 실험과 도전에 필요하다면 귀신이라도 좋았겠죠. 작품이

될 수 없는 것에 더 관심이 갔어요. 정상보다 비정상, 탈관념, 반예

술의 자유를 즐겼죠. 엽기적이고 불쾌한 것, 추한 것, 성적 도발성

이 강한 것 등이 나를 긴장시키고 신선한 감동을 줬기에 내가 뭔

가 해야겠다 싶으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고 그래서 더 힘들게 살

았어요. 반골 체질인 거죠. 후회는 없지만.

영원한 아웃사이더가 내 운명

정재숙그렇게핍박받고외톨이로사시면서외국으로나갈생각을하신

적은없나요.

이승택 1970년대 더러운 놈들 탓에 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니

밖에 나갈까 싶어 이민 서류까지 다 꾸민 적이 있어요. 한데 다시

돌아보니 그럴 일이 아니더란 말이죠. 나보다 못한 머저리들한테

지고 내가 떠난다니 분했고, 전통의 현대화 작업은 우리나라에서

만 할 수 있겠다 싶더군요. 외국 나가면 조류에 휩쓸릴까 걱정도

되고.

그런 점에서 백남준 선생이 참 고맙고 부럽고 신기합니다. 세계

현대미술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거침없는 목소리로 서구 본바닥

애들도 깜짝 놀랄 만한 독창적인 작업을 하셨느냐 하는 거죠. 그

엉뚱한 배짱 또한 변방에 앉아 있는 작가로서는 부러울 뿐입니다.

정재숙영원한현역으로서어떤계획을꾸리고계십니까.

이승택 누군가 나이가 들어 이제 은퇴해야겠다고 합디다. 그래서

내가 그랬죠. 예술가에게 은퇴가 어디 있어. 자기 작업 계속하면

되지. 하지만 이승택도 사람인지라 역시 나이를 못 이기는 점도 있

어요.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죠. 아들이 이번 전시를 보더니

‘구태스럽다’는 표현을 쓰더군요. 그렇다 해도 생을 다할 때까지 스

스로 즐겁기 위해 계속 행진할 겁니다. 인류의 문화 발전은 아웃

사이더들 손에서 이뤄졌죠. 기존 얼간이들이 “네 옳습니다” 할 때

“그건 아니죠” 하면서 손 저으며 나서는 것 말이오.

정재숙은현재<중앙일보>문화스포츠부문기자다.고려대학교에서교육학과철학을공부

했고1987년성신여대대학원미술사학과석사과정을수료했다.<한겨레신문>문화부기

자와주간지〈한겨레21〉문화팀장,<중앙일보>문화부기자와<중앙일보>일요신문인〈중

앙SUNDAY〉문화담당에디터등일간·주간지의문화부기자로20여년을일했다.

털 달린 캔버스, 1983

바람,연기,물,불안개에비하면아주물질적인재료인털로

만든작품.이털들은일본사무라이가등장하는영화에썼던

머리카락들로만든것이다.이승택은“엽기적인것,추한것,

성적도발성의방법을가리지않고취급해온것은오히려그것

들이나를긴장시키고신선한감동을안겨주기때문”이라고말

한다.

30 2010 no.08 31

국내외 작가들의 창작과 연구 활동을

지원하게 될 국내 최대 규모의 아트 레

지던시 경기창작센터가 2009년 10월

29일 개관했다. 대부도라는 지명으로

더 유명한 안산시 선감도의 구 경기도

립직업전문학교를 리모델링해 만든 경

기창작센터는 7개 동의 건물에 다양

한 분야의 작가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기반 시설을 갖추었

다. 경기도미술관(김홍희 관장)의 제안으로 2년간 준비해 문을 연

경기창작센터는 2009년 1차 리모델링을 마쳤고, 2010년 2차 리모

델링을 통해 완성할 예정이다. 창작 스튜디오를 비롯한 전시실, 작

품 창고, 공방(미디어, 사진, 목공, 철조, 도예 등), 숙소 등의 시설을

갖춘 이 창작센터는 서울 외곽에 위치해 널찍한 공간을 확보하면

서도 국내외의 왕래가 용이하고 서울과의 접근성도 뛰어나다(광

화문에서 69킬로미터, 인천국제공항에서 6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

하고 있으며, 육로로 연결되어 있다).

지역에 밀착한다

쌈지스페이스, 영은미술관 등에서 창작 스튜디오를 오픈한 1990

년대 후반, 대안 공간의 활동이 확대되고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 지

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창작 스튜디오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의 창동·고양 스튜디오, 광주의 팔각정, 양산동 스

튜디오 등이 개관하면서 정책화, 제도화의

기반이 마련됐다. 2000년대 초반에는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폐교를 활용한 창작 스튜

디오들이 생겨났으나, 도심과의 접근성이

떨어지면서 예술가들이 지역적으로 고립되

는 문제가 발생하고, 예술가들과 지역주민

간의 갈등, 자체 운영 예산 확보의 어려움 등

으로 대부분의 폐교 활용 창작 스튜디오는 문을 닫게 됐다.

최근에는 일상 공간을 연구하고 삶의 구체적인 공간에 개입하

는 공공 예술 활동의 흐름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에서는

서울시 전역의 유휴 공간을 활용한 예술창작 스튜디오를 건립하

고 있으며, 인천의 아트 플랫폼은 인천 개항기의 근대 역사 밀집 지

역을 중심으로 문화적 지형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광

주의 대인시장과 대구의 광천시장의 사례는, 삶의 공간과 유기적

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지역적이고 지속적인 창작 공간으로 전환해

가는 흥미로운 모델로 눈여겨볼 만하다.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경기창작센터는 인근의 경기도 유관 시

설, 지역주민들과의 협력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선감도와 인

근 지역은 1994년 시화방조제 건설로 갯벌이 파괴되고 섬이 육지

가 되면서 바다와 갯벌을 중심으로 살아왔던 지역민들의 생업 구

조가 바뀌었다. 그런데 최근 시화 MTV(멀티 테크노 밸리)의 건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유치 등으로 그간의 어업 기반을 바꾸어 일

아주 지역적이고 동시에 전 지구적인

문 화+공 간 _ 경 기 창 작센 터

우리나라 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10년여의 짧은 역사 속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성장했다. 시행착오라는 ‘비싼 수업료’도 여러 번 치렀다. 이제는 좀 더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지난해 10월에 개관한 경기창작센터는 지역에 밀착하면서, 세계적 흐름에도 민감한 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글백기영_경기창작센터학예팀장

32 2010 no.08 33

군 포도농장이 수자원 공사로 대거 유입되면서 다시 한번 생업 구

조가 바뀌는 힘든 상황에 직면해 있다.

경기도는 대부도와 제부도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 문화

프로그램을 개발해 지역 관광 산업의 진흥과 외부 방문객의 증대

를 꾀하고 있다. 경기창작센터는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발굴하는

프로그램과 더불어 지역 경제에도 일조할 수 있는 문화예술 활동

을 전개하고, 동시에 지역의 독특한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아야 한

다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세계와 연대한다

경기창작센터는 여러 레지던시 기관들과의 교류로 경기도 국제 네

트워크의 허브 공간으로 자리 잡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경기창작

센터는 개관 기념행사로 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레즈 아티스Res

Artis와 함께 2009년 10월 30일과 31일 양일에 걸쳐 컨퍼런스를

진행했다. 레즈 아티스는 예술가들의 창작을 지원하고 전 세계 다

양한 문화를 현장에서 체험하는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 운영 기

관의 연합체로, 현재 총 50여 개국의 200여 개 기관이 연대하고 있

다. ‘21세기 레지던시 스튜디오와 타 기관의 새로운 협력 관계’라

는 주제의 컨퍼런스에는 전 세계 70여 레지던시 기관들이 참여했

는데, MIT 비주얼 아트 프로그램 디렉터로 있는 우테 메타 바우

어, 아시아 소사이어티 미술관 디렉터 멜리사 추 등 레지던시 프로

그램을 통해 동시대 예술의 현장 변화를 이끌어왔던 유명 인사들

이 참여했다. 또 국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교환하는 ‘아카이브 자료전’이 열려 각 기관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다. 컨퍼런스 행사장을 가득 메운 200여 명의 참여자들은

저녁 늦게까지 이루어진 발제와 토론에서 아트 레지던시가 어떻게

미술관의 역할을 확대하고 새로운 기관들과 협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여러 가능성을 모색했다.

천천히, 꼼꼼하게 준비한다

개관과 함께 실시된 경기창작센터 파일럿 프로그램은 2009년 10

월부터 12월까지 3개월간 레지던시 / 스튜디오 프로그램, 커뮤니

티 프로젝트, 작품 창고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10월 15일부터

입주하여 진행된 레지던시 / 스튜디오 프로그램은 12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의 오픈 스튜디오, 그리고 지역사회의 고민들에 대

한 예술적 접근을 시도하는 지역 협력 프로젝트로 구성되었다. 작

품 창고 프로그램은 임대를 신청한 작가들을 중심으로 시범 운영

기간을 거쳐 전문적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2010년 작

품 창고 임대 작가로 선정되면 소정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작품을

경기창작센터에 위탁 관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처럼 파일럿 프로그램을 통해 테스트해보고 문제점을 수정

해가면서 좀 더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프로그램으로 완성해나갈

예정이다.

경기창작센터개관과함께진행한파일럿프로

그램에참여한작가로서경기창작센터에대한

전반적인소감을듣고싶습니다.

댄 퀑 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작

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좋았습니다.

함께 참여한 해외 작가들과 즐겁게 작업

하기도 했고,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온다면 그때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여러 분야의 사람

들과 만나 교류해보고 싶습니다.

경기창작센터 입주기간에경기창작센터에서

어떤작업을하셨는지,그동안의활동에대해

소개해주시겠습니까?

댄 퀑 이번 입주 기간의 활동은 2010년 지

역 협력 사업을 위한 리서치 프로젝트라

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경기창작센터 주

변 지역과 연계하여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이를 위한 자료들을 찾는 시간이었습니

다. 이러한 계획 수립과 함께 여가 시간을

이용해 선감원의 역사와 관련된 기념물

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바닷가 근

처를 조깅하다가 바다로부터 떠밀려온 밧

줄과 스티로폼 조각들을 발견했는데, 이것

들을 보며 선감원에서 탈출하려다 바다에

빠져 죽은 소년들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

다. 그래서 밧줄과 스티로폼 조각들을 보

이는 대로 주워와 운동장에 기념물을 설

치했는데, 어떻게 봐주실지 모르겠습니다.

멋진 작품으로 봐주시겠지요?

경기창작센터 분단현장인DMZ와시화호를

방문했는데,어떻게보셨는지궁금하고,앞으

로작업방향에대한소개를부탁드립니다.

댄 퀑 DMZ 방문은 흥미로웠습니다. 한국

전쟁에 미군으로 참전했던 아버지의 체취

가 남아 있을지 모를 현장이라는 점 때문

에 개인적으로는 감회가 더 깊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DMZ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

에 없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JSA를 비롯

해 DMZ 관련 현장을 방문해보고 싶습니

다. 하지만 이번 시화호 방문은 너무 추운

날씨 탓에 제대로 보고 느끼기 힘들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음에 또 온다면 그

때 시화호를 다시 방문해 개발로 인한 생

태 파괴 현장을 제대로 살펴보고 치유 방

법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경기창작센터 지역참여프로그램에대한작품

의방향성을알려주실수있을까요?

댄 퀑 지역주민 혹은 학생들과 함께 퍼포

먼스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12

주간의 워크숍을 통해 개인적인 이야기들

을 나누고 서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오고

갔던 이야기들을 가지고 공연으로 만들거

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의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예술대학과

연계하여 협업으로 진행할 수 있게 돼서

기대가 됩니다.

경기창작센터 잠시생활해본경기창작센터가

앞으로어떻게운영되었으면좋을지조언을

해주세요.

댄 퀑 개관과 함께 입주한 첫 작가로서 아

름다운 자연환경과 깨끗하고 쾌적한 시설

이 좋았지만, 처음이기 때문에 생필품들

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불편하기도 했

습니다. 작가들이 생활하거나 작업하는

데 필요한 필수품들이 잘 구비되어 있었으

면 좋겠습니다. 2차 리모델링 때 식당이나

카페테리아 등이 생기면 더 좋아질 거라

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직원들이 적은 탓

에 다들 너무 바빠 작가들과 함께하는 시

간이 부족해서 아쉬웠습니다.

경 기 창 작센 터 입 주 작 가 인 터 뷰

댄퀑Dan Kwong (미국)

“지역의 상처를 보듬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2009년10월29일개관한경기창작센터는3개월간의레지던시,3일

간의오픈스튜디오등의파일럿프로그램을진행했다.현재프로그램

에서부족한부분과보완해야할부분을점검하면서2010년2차리모

델링까지마치면,작가를안팎으로충실하게지원하는프로그램이만

들어질것이다.

34 2010 no.08 35

ISCP는 International Studio & Curatorial Program의 약

자로, 미국 뉴욕에 기반을 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가운

데 하나다.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작가나 큐레이터가 일

정 기간 작업실이나 전시 공간을 제공받아 활동하면서 상호 교류

를 통해 예술 창작의 발전을 꾀하는 프로그램이다. ISCP는 지금까

지 50여 개 국에서 온 850명이 넘는 작가와 큐레이터들이 참여해

왔다. 특히, ISCP는 작가, 큐레이터 그리고 비평가들이 상호 관계를

구축하면서, 중요한 논의의 장이 되어왔다.

1994년 설립된 이래로, ISCP는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퀘어 서

쪽 방향의 39번가와 8번가에 위치해 있다가 2007년 브루클린의

이스트 윌리엄스버그East Williamsburg로 옮겨왔다. 이후, ISCP는

작업 공간의 확장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을 위한 프로그램도 마련

하는 등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다.

ISCP 건물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

여 작가들은 3개월에서 12개월 사이의 기간 동안 24시간 이용 가

능한 개인 스튜디오를 제공받는다. 스튜디오 외에도 각각의 층에

는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주방이, 1층과 2층에는 갤러리가, 2층

에는 작가들의 거실 또는 휴게실로 사용되는 라운지가, 3층에는

디렉터의 사무실과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한 사무실이 있다.

2009년 11월 현재, 작가와 그룹, 큐레이터를 포함한 총 36명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작가인 김인배와 최해리

의 작업실은 2층에 위치해 있다.

자극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한다

ISCP 의 가장 큰 장점은 게스트 비평 시리즈와 연중 두 번에 걸쳐

열리는 오픈 스튜디오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교

류를 활발하게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게스트 비평 시리즈는

뉴욕을 포함한 세계 여러 지역의 저명한 전문가들이 작가들의 스

튜디오를 방문하여 직접 대화하면서 비평적 의견을 주고받는 기

회이며, 오픈 스튜디오는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예술을 좋아하는

일반 관객도 참여할 수 있는 행사다.

특히 게스트 비평 시리즈는 ISCP 프로그램의 특징으로 손꼽

히는데, 작가들의 작품을 뉴욕에 있는 미술관, 갤러리, 그리고 대

안공간에 소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고 있다.

1년의 참여 기간 동안 적어도 22명의 게스트 비평가들이 작가

들의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작가와 직접 교류하고 있다.

오픈 스튜디오는 5월과 11월에 열리는데, 이 기간 동안 약

2000명의 전문가와 관람객들이 스튜디오를 방문하며, 2009년 11

월에는 6일에서 9일까지 4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오픈 스튜

디오 기간 동안 대중과 전문가들은 현대미술 작업과 개인적인 성

과를 엿볼 수 있으며, 대다수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뉴욕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게 된다. 또한 오픈 스튜디오를 통해 작가들은 큐

레이터, 갤러리 관계자, 저널리스트, 작가를 비롯한 재단, 레지던시

프로그램, 그리고 정부 문화 기관 인사들을 포함한 다양한 방문객

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들이 작업 공간을 제공받듯, 프로그램 참여 큐레이터들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무 공간을 제공받는다. 큐레이터 프로

그램은 1999년에 개설되었는데, 작가들보다는 다소 짧은 시간인,

2개월 내외로 참여하게 된다. 큐레이터는 게스트 비평을 위해 스

튜디오를 방문하는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으며, 참여 기간이 오픈

스튜디오 전시와 겹칠 때는 작가들처럼 큐레이터 자신의 프로젝

트에 관한 서류나 작품을 공개한다. 또한, 외부 교육 시설 또는 예

술 기관과 연계하여 강연을 하거나 다른 작가들의 스튜디오를 방

문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ISCP는 큐레이터의 리서치 작업, 글

쓰기, 뉴욕의 영리 또는 비영리 전시 공간 조사, 도서관, 미술관, 갤

러리, 고등기관 방문, 그리고 미국 내의 예술 자금과 자선의 독특

한 역할 등 미국 내 큐레이터 업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장려하

고 있다.

열림이 소통으로, 소통이 창작으로

많은 예술가가 ISCP에 가기를 바란다. 그곳의 프로그램이 수많은 나라의 예술가와 큐레이터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ISCP의 성장 촉진 프로그램은 과연 무엇일까.

글・사진최미영_경기문화재단미국통신원

해 외 아 트 레 지 던 시 프 로 그램 _ I S C P

발디딜틈없이성황을이루었던ISCP의오픈스튜디오오프닝현장.ISCP건물은3층으

로구성되어있는데,레지던시프로그램참여작가들은3개월에서12개월동안24시간이

용가능한개인스튜디오를제공받는다.스튜디오외에도각각의층에는공동으로사용할

수있는주방이,1층과2층에는갤러리가,2층에는작가들의거실또는휴게실로사용되는

라운지가,3층에는디렉터의사무실과프로그램을운영하기위한사무실이있다.

ISCP의 국내 작가들

ISCP는디렉터이자설립자인데니스엘리어트Dennis elliot와함께1인작

가레시던시로1994년시작했는데,그1인작가가바로한국의코디

최다.지금까지20여명의작가들이거의매년빠지지않고거주작가

및큐레이터로참여하고있는데큐레이터의참여는드물어서아쉽다.

2006년에는윤정미,정연두,최진기가거주작가로있었는데,레지던

시이후윤정미작가는첼시젠킨존슨Jenkin Johnson갤러리에서개인전

을,그리고정연두작가는모마the Museum of Modern Art에서미디어스크

리닝을가졌다.또2008년5월오인환작가의아트선재센터개인전또

한ISCP에서거주했을당시일부진행되었던작업이라고한다.

글전민경_경기문화재단미국통신원

36 2010 no.08 37

마 음 을 건 드 리 다 _ 조 선 시대 의 < 호 표 흉 배 > 예술무대 <산> 제공 극단 <얼굴과 얼굴> 제공

옛날이야기는 으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한다. 호랑이가 주인공이 아닌 이야기도 호랑이로 운을 뗄 만큼 호랑이는 이 땅

의 선인들에게 가까운 존재였다. 우리나라의 신화나 설화 등에서 호랑이 이야기의 비중은 세계 으뜸이다. 최남선의 말대로 호랑이만으로

‘천일야화千一夜話’를 꾸밀 수 있는 ‘호담국虎談國’이었다.

옛이야기 속의 호랑이는 힘세고 날래면서도 어리석어 우스꽝스럽다. 반면 신통력을 지닌 영물로 사람이나 짐승으로 변신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의義를 지키고, 약자와 효자, 의인義人을 돕고, 부정함을 멀리하는 신비스럽고 교훈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호랑이 관련 기록 중 다수는 호랑이가 나타나 가축이나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호환虎患’에 관한 것이니, 맹수

호랑이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구한말 조선을 네 차례나 여행한 뒤 쓴 보고서에서 “‘조선 사람은 1년의 반

을 호랑이를 쫓느라 보내고 1년의 나머지 반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문상을 가느라 보낸다’는 중국 속담이 거짓이 아니”라고 하면

서 당시 호환의 심각성과 호랑이에 대한 조선인의 두려움을 기술했다.

호랑이의 무시무시한 힘은 ‘벽사辟邪’와 ‘용맹勇猛’의 상징이 되었다. 호랑이를 그린 세화歲畫나 용호문배龍虎門排, 그리고 호랑이 발

톱이나 이빨로 만든 장신구, 호랑이 가죽으로 덮어씌운 신부의 가마 등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무관을 ‘호반虎班’이라

고 별칭하며, 무관의 관복 앞뒤에 호랑이 무늬 흉배를 달았던 것도 이런 상징과 연관된다.

아청색 비단에 금사로 호랑이와 표범, 소나무, 대나무, 구름, 그리고 바위와 보문이 직조된 호표흉배虎豹胸背는 그동안 문헌과 초상화

에서만 확인되다가, 실물이 발굴된 것은 경기도박물관의 소장품이 유일하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세기 말, 내금위 정략장군충

무위부사과內禁衛定略將軍忠武衛副司果를 지낸 진주 류씨의 처 의인 박씨의 여성 예복에 부착돼 있던 것으로, 무덤에서 나온 출토 유물

이다. 그런데, 호랑이와 표범이 한 화면에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호랑이와 표범을 한 종류로 보고 범으로 통칭했

다. 호랑이라고 하면 줄범[虎]만을 가리키지만, 범은 줄범과 돈범[豹] 모두를 일컫는다. 민화에는 흔히 줄범과 돈범을 함께 그려 어미와 새

끼로 보거나 암수 관계로 표현했는데, 여기에서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지는 좀 더 연구해볼 일이다.

조선총독부의 통계연보 등을 종합해보면 일제강점기 동안 141마리의 한국 호랑이가 잡혀 죽었다. 이후 1996년 환경부가 공식적으로

는 멸종한 것으로 보고한 한국의 호랑이! 하지만 지금도 백두대간 어딘가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한국 야생 호랑이·표

범 보호보존 연구소를 운영하는 임순남 소장은 멸종 위기에 놓인 러시아와 중국, 북한, 그리고 한국의 호랑이가 만나 번식할 수 있도록 4

개국의 통로를 열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호랑이가 사라진 숲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된 멧돼지가 도심에 출몰한다는 ‘저환猪患’ 뉴스가

심심찮게 들리는 시대, ‘인간의 소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한국 호랑이의 포효 소리를 듣고 싶다.

그 많던 한국의 호랑이는 어디로 갔을까?글박본수_경기도박물관학예팀

<호표흉배虎豹胸背>|조선시대16세기말|안성시대덕면무릉리진주류씨의부인박씨묘출토|비단에직조|35.7×36.2cm|경기도박물관소장

38 2010 no.08 3938

전 통 을 잇 는 다 _ 경 기 도 무 형 문 화 재 제 2 4 호 나 전 칠 기 명 장 배 금 용

자개처럼 영롱한, 옻칠처럼 그윽한

작업실에 꼭꼭 갇혀 있어도 그는 늘 자연의 품에 산다. 모란이며

매화며 해바라기가 계절에 상관없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학이며

나비며 개구리가 철에 관계없이 허공을 휘젓는다. 한겨울에도 꽃

이 피고 새가 날아다니니, 그야말로 ‘철모르는 인생’이다. 뿐인가.

가만히 앉아서도 그는 늘 바다와 산을 느끼며 산다. 먼 바다에서

올라온 조개껍데기는 눈부신 문양으로 다시 태어나고, 높은 산에

서 내려온 옻나무 수액은 그윽한 빛으로 새로이 탄생한다. 바다와

산의 향기를 코가 아닌 손으로 느끼며 살아가니, 참으로 ‘희한한

인생’이다.

새것으로 옛것을 지키다

50여 년을 해오고도 그의 작업 시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자개를 오릴 때 쓰는 실톱대도, 옻칠을 할 때 쓰는 귀얄도, 그의 손

과 하나 된 지 이미 오래. 하지만 제아무리 능숙한 장인이라도 제

작 단계 곳곳에 숨은 건조 과정 앞에선 그저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나전부터 옻칠까지 수십 개의 섬세한 과정을 거치는 동

안 끊임없이 ‘멈춤’을 반복해야 하니, 아무리 작은 작품이라도 6개

월 이상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는 완성되지 않는다.

“도안이 가장 어려워요. 어떡하면 좀 더 새로운 문양을 만들

수 있을까,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걸 고민합니다. 길을 걷다가도,

TV를 보다가도 신선한 그림이 어디 없나 찾아보게 돼요.” 작업 시

간처럼, 그의 고민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그는 전통을 잇는 것이 ‘옛것 그대로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고려시대엔 고려시대의 기법이 있고 조선시대엔 조

수많은 질문이 한 가지 답으로 귀결된다. “먹고살아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나전칠기를 만들며 보낸 50여 년 외길의 삶을 그는 결코 꾸미거나 높이지 않는다. 문화재도 명장도 다만 서류상의 이름일 뿐,

자신은 그저 ‘생계형 장인’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춘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까를 고민하느라 오늘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앉은 자리는 낮춰도 열정의 온도는 낮추지 않는, 나전칠기 명장 배금용.

글박미경_자유기고가|사진이한구

40 2010 no.08 41

선시대의 기법이 있듯, 21세기엔 21세기의 기법이 필요하다고 믿는

다. 옛것을 지키되 그 시대에 맞는 ‘무엇’을 창조적으로 덧붙여나가

는 일. 전통과 현대는 등지고 걸어갈 적이 아니라, 어깨 겯고 나란

히 걸어갈 친구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다. 언젠가부터 그는 고

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기법 그대로를 재현한 작품 하나를 끝내면,

21세기의 아파트에도 어울릴 법한 현대적 작품을 만들곤 한다.

그의 작품이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게 된 데에는 둘째 아들 광

우 씨의 영향이 크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그의 뒤를 이어

나전칠기를 만드는 광우 씨는 신세대 장인답게, 나전칠기로 휴대

폰 케이스나 시디 케이스, 마우스 같은 현대적 생활 소품을 즐겨

만든다. 아들의 ‘새로운 시도’가 그는 참 반갑다. ‘가까이 하기엔 너

무 멀어진’ 나전칠기를 현대인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고맙고 기특해서, 함께 작업하며 겪는 의견 충돌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그다.

“좋은 시절이 있었죠. 머잖아 곗돈을 타게 될 사모님들이 선금

을 미리 주고 반년에서 일 년씩 자개장을 기다려주던 시절 말이에

요. 그 시절이 그립긴 하지만, 지금도 나쁠 건 없어요. 지난봄에 초

등학생을 대상으로 나전칠기를 직접 만들어보는 민속공예교실을

열었는데, 학부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더라

고요. 누구나 좋아한다는 걸 알았으니, 더 많은 사람이 나전칠기

를 누리도록 하는 일이 숙제로 남았어요.”

돌아오는 새봄에도 민속공예교실을 연다. 봄이 오려면 아직 멀

었는데도, 그의 마음은 벌써 새봄에 가 있다.

숙명과 소명 사이의 나전칠기

참으로 지긋지긋한 가난이었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읜 뒤로, 그

의 유년은 그 자체로 ‘빈곤의 뜰’이었다. 큰집과 외갓집을 전전하다

밥이라도 제때 먹고 싶어 들어갔던 고아원. 가족과 고향이 사무치

게 그리워 그곳을 탈출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열 살이었다. 함께

고아원을 나온 친구와 고향 언저리까지 걸어갔지만, 그들을 반겨

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멍석을 말아 잠을

자고, 깡통에 밥을 빌어먹으면서 여러 날을 보냈다. 어느 날 버스터

미널에서 기적처럼 외삼촌을 만났다. 외삼촌을 따라 서울로 올라

오면서, 그의 ‘나전칠기 운명’은 시작됐다. 외삼촌의 집 바로 뒤에

당시 최고의 나전칠기 장인이던 최준식 선생의 공방이 있었다. 외

삼촌의 짐을 덜어주려고 들어간 그곳에서 2년간 물지게를 졌다.

“공방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나만 남더

라고요. 어린 나라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선생님이 비

로소 제게 나전칠기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셨어요. 찬물로 작업을

해서 손바닥은 늘 갈라터지고 툭하면 옻이 올라 온몸이 엉망이

되었지만, 먹고살아갈 기술을 배우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참을 만

하더라고요. 그 무렵 선생님을 통해 최고의 나전칠기 장인을 많이

만났어요. 그분들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줬죠.”

성인이 되어 자신의 공방을 차렸지만 경영에는 소질이 없었

던 그는 폐업과 개업, 취업을 오랜 세월 반복해야 했다. 그사이 화

공약품으로 칠한 나전칠기가 판을 치고 세련된 서양식 가구가

등장하면서, 평탄치 않던 그의 삶은 점점 더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래도 그 길을 벗어날 순 없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었

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던 1980년대 후반, 지인들

의 권유로 난생 처음 ‘작품’이란 걸 응모했다. 화려하고 섬세해 재

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고려시대 나전칠기에 꼬박 2년을

매달렸다. 문양과 문양 사이에 철선을 꼬아 상감해 넣은 나전국

당초문경함. 이 작품으로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입

선의 영예를 안았다.

“내 이름이 신문에 난 게 정말 신기했어요. 어찌나 기쁘던지 자

다가도 자꾸 웃음이 나더라고요.”

이때부터 상품이 아닌 작품에 몰두했다. 이후 대한민국전승공

예대전과 동아공예대전, 전국공예품경진대회 등에서 연이어 상

을 거머쥐면서, ‘상복 터진 사람’이란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1998

년에는 ‘공예인의 꽃’이라 불리는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2001년엔 기능인의 최고 영예인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뒤

늦게 탄 곗돈처럼, 영광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꿈은 머지않아서

“상은 참 많이 받았지만, 주로 입선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입선

처럼 고마운 상이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처음부터 대상을 손에 쥐

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 작품에 매달리지 않았을 테니까요. 딱

입선만큼의 재능을 가졌기에 더 노력할 수 있었고, 그랬으니 그나

마 오늘에 이른 거예요.”

박물관 소장품으로, 국제공항 벽화로, 사극 영화의 소품으로.

다양한 곳에 작품이 쓰였어도, 그에겐 여전히 ‘돈’이 붙지 않는다.

그것도 참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나전칠기로 큰돈을 벌었다

면 ‘모든 과정을 스스로 책임지는’ 현역으로 여태 살고 있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순다섯의 그는 요즘도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

까지 나전을 하거나 옻칠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삶의 재미는 어디

서 찾느냐고 그에게 물을 필요는 없다. 그의 즐거움은 온전히 공방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전칠기 박물관을 만드는 게 꿈이었는데, 박물관을 만들

만큼의 돈이 모이지 않아서 일단 포기했어요. 그래서 좋은 작품

을 많이 남기는 걸로 꿈을 바꿨어요. 그 꿈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어림잡아 400여 점이다. 작품을

팔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해왔기 때문에, 그의 작업실은 그 자체로

이미 나전칠기 박물관이다. 꿈을 이루고도, 이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 하나가 칠 묻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얼굴에 진 주름은 상감된 자개만큼 눈부시고, 손에 묻

은 때는 옻칠의 빛처럼 그윽하다.

42 2010 no.08 43

경 기 , 근 대 의 풍 경 을 찾 아 _ 일 산 역

내가 살던 속초에는 기차가 다니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원산과 양

양을 잇던 동해북부선 철로가 파괴되었으니 나는 당연히 기차를

보지 못했다. 내가 기차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강릉에

가서였다. 남대천 주변의 여관에서 묵었는데 아침을 먹고 천변에

서 놀다가 남대천을 건너는 웅장한 기

차의 위용과 뼈마디를 밟고 가는 듯한

굉음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

있어 기차는 경이驚異였다.

그 후 여기저기를 떠돌다 직장 생

활을 하고 먼 이국을 떠돌기도 했다. 그

러다 한 여자를 만나 일산 신도시에 살

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신도시는 황폐

했다. 나무들은 아직 자라지 않아 앙상했고 땅은 텅 비어 있었고,

비어 있는 땅 여기저기에 외로운 건물들이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

는 신도시에는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어디가 어딘지 잘 구

분되지 않았다. 버스를 타서 지레 내리는 일도 다반사고, 어디를 가

고자 해도 방향을 잡지 못해 엉뚱한 차를 타기 일쑤였다. 서울과

일산을 오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직장이 반포였던 나는 주로 지하

철을 이용했다.

그러다 우연히 신촌에서 버스를 타고 올 일이 있었다. 버스만

타면 자는 버릇 때문에 잔뜩 긴장하면서 정류장을 세고 확인하던

나는 끝내 잠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곤 화들짝 눈을 떴다. 황량한

풍경에 철로를 건너는 육교가 눈에 띄었다. 아뿔싸! 집을 지나쳤다

는 것을 알아챈 순간 나는 황급히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여기가 어딘가. 나는 순간 착각했다. 경의선 철로를 발견한 나는 신

도시 바깥으로 와버렸다고 느꼈다, 당연히. 다행히 육교가 있는 곳

에 내렸다는 것에 감사했다. 육교 위에서 한밤의 짙은 안개에 덮여

있는, 먼 안개의 두터움 속으로 사라지는 경의선 철로를 감상했다.

사방은 어두웠고, 여름날의 습기가 곳곳에서 묻어 나왔다.

일산역은 거기에 있었다. 낮은 십자형 맞배지붕에 평면은 일자

형이었다. 전형적인 일본의 목조 양식을 흉내 낸 건물이었다. 긴 장

방형 평면에 지붕 쪽에서만 짧게 십자를 이루는 박공벽에는 ‘一山’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분명히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이었

다. 그렇다면 이상했다. 일산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정발산동의 초

가집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파괴된 걸로 알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나타난 일산역의 존재는 마치 차원을 미끄러져 이동한 것 같은 묘

한 공황 상태에 빠지게 했다. 신도시 한가운데서 짙은 안개 속에

나타난, 못해도 70년 전에 지어진 간이역이라니. 나는 얼른 공중전

화로 아내를 불렀다. 전화가 자석식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스러운

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내라고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완벽한 격리감에 한동안 말을 잊었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택시를 타고 서둘러 존재하지 않는 그

곳을 빠져나왔다. 나중의 기억이 겹쳐

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환한 창 안에

는 노파와 손자가 대합실에 앉아 있었

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일산역의 존재를 알았

다. 일산역을 거쳐 가는 경의선 철도는

1904년 러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

용철도였다. 한국의 모든 철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을 위한 것이거나, 군용철도가 그 바탕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철도는 한국인의 생활 철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산역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피난민을 나르기도 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경기 북부 지방의 주민들을 서울과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수단이었다. 1970~80년대 젊은이들에겐 경의선 열차가 백마

의 낭만적인 카페로 이어주는 역할을 했겠지만 서민들에겐 시장

으로 이어주는 길이었다.

일산역이 있는 옛 일산의 5일장은 인근 지역에서는 가장 큰 장

이었다. 내가 대화동에서 살 때만 해도 웬만한 먹을거리는 일산장

에서 샀다. ‘에누리’와 ‘떨이’ 그리고 ‘인심’이 여전히 남아 있는 시

골 장터였다. 장이 열리는 날이면 각설이가 나오고, 소머리가 통째

로 팔리는가 하면, 면발을 길게 뽑아 걸어두는 옛날 국수집 풍경

도 보였다. 솜방망이만 한 메추라기가 꿈틀대고, 잘 말린 고추, 어

물전, 약전들이 차일을 치고 떠들썩했다. 항상 어른들 얘기는 옛날

만 못하다지만 내가 보기엔 3일, 8일에 서는 일산 5일장은 여전히

흥겹기만 했다.

일산역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이 5일장에 나오는 상인들과 물

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느리게 가는 기차에 보따

리나 함지를 안고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일산역에서 황급

히 내리는 아주머니들, 아예 기차 안에서 이루어지던 이른 흥정들,

고작 나물 몇 단을 심심풀이로 팔러 나오는 할머니들, 그중에는 여

기 일산역에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굶주림에 떨며 피난 열차에

올랐던 사람들도 있으리라. 여기서 사랑하는 낭군을 학도병으로

보내며 눈물의 전송을 끝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한 정한도 있었겠

지. 시간은 흘러간다. 공간도 바뀌고 우리 생활의 모습도 변해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 있어 기차는 경이다.

경의선이 복선 전철로 개통되면서 일산역은 신역사로 이전했고, 이제 구 일산역은 문화재로 등록되어 보존되고 있다. 일산장과 신역사는 좀 떨어져 있어서 전처럼 내리자마자 북적거리는 시장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 기차는 경이다. 어느 깊은 지하철 플랫폼에서도 나는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들리면 설렌다. 청색 맞배지붕의 일산역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설레게 한다. 그렇게 남아 있어서 기쁘다.

글함성호_시인|사진이한구

44 2010 no.08 45

2008년 10월 개관한 백남준아트센터는 개관 페스티벌을 시작으

로 <신화의 전시-전자 테크놀로지>전을 비롯한 다양한 특별전과

영화 상영, 기획전을 열어 21세기의 백남준을 찾는 이들에게는 ‘성

지’가 되어 가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국제예술상은 우선 백남준

작품 세계에 경의를 표하는 데 의미가 있다. 동시에 전 세계에 흩

어져 있는 작가들 가운데 백남준처럼 놀라운 작업을 한다고 생각

되는 작가를 찾아내어, 더욱 확장된 미래의 예술을 꾀하기 위한 것

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테크놀로지와 예술이 결합하

고, 과학과 인류학이 만나며, 음악과 행위, 퍼포먼스performance가

철학에 연결되는 등, 다양한 분야의 만남이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

될 것이다. 그것은 물리학의 아인슈타인과 예술의 파블로 피카소

를 결합하는 일보다 더 광범위한 작업이다.

제1회 수상 작가들은 이승택(한국, 1932~), 안은미(한국,

1962~), 시엘 플로이에Ceal Floyer(파키스탄, 1968~), 로버트 애드리

언 엑스Robert Adrian X(캐나다, 1935~)이다. 이들은 국내 심사위

원 네 명과 국외 심사위원 여섯 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선정

했고, 수상 작가들에게는 총 5만 달러의 상금을 수여했다. 백남준

아트센터의 이영철 관장은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선정했지만 각자 다방면에서 백남준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네 사람을 모으면 백남준이 보인다

백남준은 스스로를 인류학적으로는 몽골 유목민의 후예임을 강

조했으며 정신적으로는 샤머니즘의 막대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기질을 동시대 테크놀로지와 현대음악에 결

부시키고, 지구 차원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주를 향하는 ‘소통의

예술’로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미술’이라고 부르는 시대

에 진입해 있다.

그런데 이번 제1회 국제예술상의 경우, 우연인지 필연인지 네

명 수상자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백남준의 예술이

백남준아트센터를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으로 부르는 데는 전 세계 예술계에 큰 충격을 던진 백남준의 작업처럼

이곳에서 새 시대의 예술을 계속 창조하겠다는 열망과 의지가 담겨 있다. 이를 위한 본격적인 시도가 바로 <제1회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의 제정이다.

수상자의 이름과 이력만 훑어서는 상의 특징이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백남준 예술의 퍼즐 맞추기가 될 이 전시가.

글김미경_강남대교수(미술사학),한국근현대미술연구소KARI소장|사진이한구

작업은 달라도, 다들 ‘거꾸로’의 정신으로

전 시 산 책 _ < 제 1 회 백 남 준 아트센 터 국 제 예 술 상 수 상 작 가 전 >

Ceal Floyer

eun-Me Ahn

Robert Adrian X

seung-taek Lee

46 2010 no.08 47

것은 정말 백남준다운 유머이다. 이번 국제예술상 수상 작품들 앞

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을 법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예술 언어를 개척하다

이번 국제예술상 수상자들의 작업을 보면 왜 네 사람이 수상했으

며 그들이 왜 백남준과 연결되는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힘들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들 네 사람을 하나로 묶으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백남준 예술에 접근하게 된다.

평생 한국에 거주하며 물, 불, 바람, 흙과 같은 우주의 4원소를

탐구해온 이승택은 백남준처럼 모든 기성旣成의 제도와 형식, 그

리고 권위를 거부한다. 반反예술로서 기성의 예술 개념을 훌쩍 뛰

어넘는 작업을 해온 그는 1950년대부터 한 세대 이상을 앞서가는

수많은 실험을 해왔다. 천 조각들이 보이지 않는 바람을 타고 날릴

때 비물질과 물질이 어우러져 서로를 상생相生시키는 <바람> 시리

즈 등이 대표적이다. 이승택은 이번 전시에 <털 달린 캔버스>, <파

도 물 그림>, <지폐조각> 등의 작업을 내놓았다. 기성 예술과 상업

주의에 동요되지 않는 평생의 도전적 작가 정신은 팔십에 가까운

나이에도 노장을 과시하며, 백남준의 ‘샤먼’ 기질에 부응한다.

또 다른 한국인 수상자인 현대 무용가 안은미는 시각 예술과

음악 등 다양한 장르와 교차하는 인터미디어Inter Media 작업을

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백남준과 닮았다. 또한 강렬한 주술적 에너

지를 뿜어내는 아티스트라는 점에서도 백남준과 닮았다. 전시 작

품으로는 백남준이 플럭서스Fluxus 멤버였던 앨리슨 놀스Alison

Knowles에게 바친 악보, <한 아름다운 여류 작가의 연대기>를 재

해석한 <한 아름다운 무용가의 연대기> 등을 선보였다. 또한 오프

닝 행사에서는 어둠이 깔린 저녁 베토벤의 랩소디 연주에 맞추어,

자신이 입은 흰 드레스(사실은 흰 넥타이들을 연결해서 만든 것)

를 잘라 관객들에게 나누어주고 여성 관객의 머리카락을 잘랐으

며, 기중기에 매달린 수십 대의 피아노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가운

데 공중에서 피아노를 도끼로 여러 번 내려친 뒤 떨어뜨려 박살 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다

시 말해 이승택과 안은미는

누구보다도 풍부하게 한국의 ‘샤

먼Shaman’ 기질을 품고 있으며, 로버

트 애드리언 엑스와 시엘 플로이에는 깊은 이

성적 사고로 논리적 개념과 테크놀로지를 통한 소통의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다. 이처럼 두 명의 한국인과 두 명의 서구

인이 만나면 ‘백남준’에게 가까워진다. 또한 이승택과 애드리언 엑

스는 ‘남성’으로 70대 나이의 세대이고, 안은미와 시엘 플로이에는

‘여성’으로 40대의 세대다. 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교차하는 지점

도 백남준이고, 이처럼 세대가 교차하면서 동시에 세대를 초월하

는 것도 ‘백남준 예술’의 특성이다.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Art is just fraud’라고 말했다. 많은 사

람이 그 말을 왠지 통쾌한 것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여기지만 사

실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의미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말을 ‘사

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예술’ 혹은 ‘자기기만

의 예술’이라고 생각

하기 쉽지만,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자기기만을 하는 예술이 어떻게 역사를 초월하는 진

정성을 지니고, 많은 사람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 그들을 선도할

수 있겠는가?

백남준의 예술은 그렇지 않다. 백남준이 말하는 ‘예술은 사기

다’라는 의미는, 독재자(지배자)가 백성에게 내거는 표면적 구호는

‘보호’이지만 실상은 백성을 ‘탄압’하는 것이므로, 독재자가 백성

에게 사기를 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따라서 역으로 백남준 자

신은 예술을 통해 독재자에게 사기를 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아

방가르드Avant Garde 예술, 즉 최전선에 서 있는 앞선 예술을 이해

하지 못하는 사람(독재자) 앞에 그 예술을 던져놓음으로써 혼란

을 불러일으키고, 그가 무식을 감춘 채 보는 척하게 만드는 일, 그

무용가안은미씨는2009년11월28일백남준아트센터앞에서74대의피아노를크레인을이용해하늘로들어올렸다.고백남준의일흔넷생애를상징하는피아노가운데한대는지상으로

떨어져산산이부서졌다.흰색넥타이로만든웨딩드레스를입은안은미씨는공중에매달려도끼로피아노를부수는퍼포먼스도펼쳤다.사진은이를위한리허설장면을찍은것이다.(오른

쪽)시엘플로이에의설치작품과이승택의작품들이보이는전시장.

48 2010 no.08 4948

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시엘 플로이에는 일상의 오브제를 지각하는 과정을 탐구하면

서, 공간을 물질적이고 개념적으로 생각하는 멀티미디어 작가이

다. 드릴로 벽에 구멍을 내고 바로 그 구멍 안에 드릴의 플러그를

꽂아 넣은 <드릴Drill>이나, 스위치를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어서

환등기로 그것을 벽에 투사해서 실제 스위치처럼 보이게 한 <라이

트 스위치Light Switch> 등, 일상의 오브제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

을 뒤집어 바꾸어놓는다. 테크놀로지의 사용 방식을 유머러스하

게 뒤집는 그녀의 작업은 백남준의 테크놀로지 사용 방식에 아주

가까이 접근한다. 논리와 유머 사이, 테크놀로지와 감수성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는 그녀의 작업이 백남준의 예술과 만나는 것이다.

로버트 애드리언 엑스는 설치, 음악, 라디오 프로젝트와 관련

한 작업을 하며 전자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미디어 설치 미술가이

다. 백남준이 위성 수신을 통해 전 세계에 동시 방영했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처럼 감시카메라를 이용한 자신의 초기 미디어 작업

을 보여준다. 백남준이 위성시대의 비디오 아트로 전 지구의 인간

들을 하나로 만들었던 것처럼, 로버트 애드리언 엑스 역시 테크놀

로지와 미디어아트 등을 통해 끊임없이 관객과 소통한다는 점에

서 백남준의 정신을 닮았다.

전위예술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스

스로의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세기는

변하고, 이제 우주 생태학의 시대를 맞고 있다. 예술이 그저 그림이

거나 조각이라고 생각해왔다면, 백남준의 예술과 국제예술상 수

상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문화 영역이 교차하고, 생각 자

체가 예술이 되며 과학이 예술이 되는 21세기를 체험해보자.

◉<제1회백남준아트센터국제예술상수상작가전>은백남준아트센터

에서2010년2월28일까지전시된다.문의031-201-8571

백남준의정신을이어가는작가를발굴하기위해마련한<제1회백남준아트센터국제예술상>시상식이11월28일오후백남준아트센터에서열렸다.시상식에는김문수경기지사,백남준유

족대표켄하쿠다씨를비롯한국내외문화예술계인사들이참석했다.미디어설치예술가인로버트애드리언엑스,멀티미디어작가인시엘플로이에,현대무용가안은미,설치미술가이승택

이수상의영예를안았다.

백남준의 정신을 공유한 네 명의 수상자

시엘 플로이에 Ceal Floyer

1968년생으로,현재베를린에서작업하고있다.2002년부터유럽의여러도시와미국,캐나다

등에서개인전을열었으며,일상소품들을결합해오브제에대한인식과상황적해석의관계를

표현하는작업을주로하고있다.물리적,개념적공간에대한의문을단순한멀티미디어작품으

로풀어낸다.물건의일상적인용도를의심하며,일상적인물건을다양한형태로재탄생시키며,

전시장에서예술작품을보여주는관습적인방식에도전하고있다.

안은미 eun-Me Ahn

1962년생으로,무용가·안무가·예술감독으로활동하고있다.한국의전통무용과현대미학

의화려한요소를병치시키는작업을하고있다.잘알려진전통적이야기에서영감을얻어그것

들을현대적으로재해석하고있으며,화려한의상과독특한음악을결합해독창적인퍼포먼스

를구현하는것으로유명하다.최근의작업은바리공주설화를포스트모던한환상세계로재해

석한‘심포카(SymphonicArts)안은미의바리-이승편’이며피나바우시국제무용제등에서

선보였다.

로버트 애드리언 엑스 Robert Adrian X

1935년생으로,현재비엔나에서활동하고있는작가다.1957년부터설치,음악및라디오프

로젝트등을해왔다.1979년부터는통신분야작업의선구자가되었으며,인터넷이전부터글로

벌전자네트워크를활용해작업을한작가중의하나다.CCTV라는감시비디오를사용해그위

험성을보여준초기설치작품들과그의웹사이트인‘예술과정치’같은프로젝트들은현대미술

의정치화와관련한개념적잠재성을보여주고있다.

이승택 seung-taek Lee

1932년생으로,1950년대후반부터자신만의형식에대한끊임없는질문과재발견을통해서한

국적맥락을가장독특하게표현하는동시에근현대미술사에도완벽하게들어맞는조각,페인팅,

환경작품들을제작하고있다.“있는것보다는없는것,보이는것보다는보이지않는것에대한

존재론적인관심에중심을두었”던그는불,연기,바람,머리카락,돌등의다양한재료를사용

해현상에대한의문을집중적으로제기하는작업을꾸준히해왔다.“나는늘세상을거꾸로보

았고거꾸로생각하는네거티브전략의승자로서오늘날에도계속해오는처지”라고말한다.

50 2010 no.08 51

2009년 6월 27일 새벽, 스페인 세비야에서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조선 왕릉 40기를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였다. 유네스코 등재는 그 민

족의 역사와 문화가 인류 공영의 가치를 지녔다는 인증이다.

조선은 단일 혈통으로 구성된 세습 왕조로, 518년간 왕조가 지

속되었고, 재위한 27대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히 보존된 사례는

세계사에서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 왕릉에 다가가면 무수한 드라

마와 교훈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왕릉 순례는 ‘죽음과 역사’라는 두 가지 화두와의 만남이다. 대

부분 경복궁을 중심으로 100리 안에 있어서, 즐거운 소풍놀이다.

사색과 성찰, 휴식과 운동이란 부가가치도 따른다. 조선 왕릉은 조

상들이 후손들에게 남긴 최고의 선물이며, 조선 왕릉은 전체 면적

이 어떤 개발도 허용되지 않는 성역이다.

죽음과 역사라는 화두

경기도박물관에서 2010년 2월 21일까지 <조선 왕릉 사진전>이 열

린다. 사진작가 최진연, 이선종 씨가 촬영한 사진과 국립문화재연

구소와 국립민속박물관 등 관련기관에서 대여한 자료와 사진 등

약 85점의 전시물을 4부로 구성하여 전시하고 있다. 조선 왕릉의

가치와 매력을 음미할 수 있는 전시회로, 여러 곳에 산재한 조선

왕릉을 한곳에서 관조할 수 있다.

생존 당시에는 대궐문 앞에도 얼씬거리지 못했을 테지만 이젠

영욕과 함께 누워 있는 왕의 발치까지 성큼 다가가 무례한 자세로

술잔을 건네고 담판을 지을 수 있다. ‘그때 왜 그리 난폭하셨소? 얼

마나 재밌었소? 어째 자식이 그리 많소? 창살 없는 감옥이라 얼마

나 고독했소?’ 장검 짚고 곁에 선 무인석을 향해, ‘근무 똑바로 서

시오!’ 하고 제멋대로 떠들어도 처형당하지 않는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면 그 속에서는 무수한 역사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왕릉의 규모와 형태는 권력의 성쇠, 역학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를 지극히 사랑해 강비가 죽자 도성

안에 능을 만들었지만(정릉,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 태조가 죽자

태종은 강비의 무덤을 양주 사한리(현재 성북구 정릉동)로 이장했

고, 강비를 후궁으로 강등해 능을 묘로 격하시켰다. 죽으면 끝인 것

이 세속의 이치지만 권력과 연루되면 죽어도 끝이 아니다. 서울 중

구 정동과 성북구 정릉동은 그런 사연에 의해 붙여진 지명이다.

6대 단종은 유배지 영월 청령포에서 17세(1457년 10월)에 죽었

다. 암장된 지 60년 후 무덤을 겨우 찾았다. 그로부터 15년 후 그곳

에 간단한 석물을 세웠다. 다시 180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

비로소 단종이란 묘호와 장릉이란 능호를 받고서 종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장릉은 서울에서 가장 먼 능이다. 도성에서 100리를 벗

어날 수 없다는 규정이 적용될 수 없는 단종의 운명 때문이다. 부

인 송씨가 묻힌 사릉(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과는 300리

나 떨어져 있다.

500년 조선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 왕릉이다.

그곳에는 해마다 봄이면 파란 잔디가 새롭게 돋고 가을에는 단풍

치장이 현란하다. 눈보라 치는 날에는 절해고도에서 면벽 수행하

는 선객처럼 의연하다.

죽음 앞엔 누구나 숙연해진다. 하찮은 미물의 죽음 앞에서도

경건해진다. 500년 조선왕조의 영욕을 온몸으로 받다가 이승을

하직한 왕들의 무덤을 찾아간다. 왕릉은 사색의 공간이다. 죽음을

중심에 둔 사색이다. 특히 공인의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

든다. 왕은 권력의 정점에 있는 공인 중의 공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어도 죽지 못한다. 육신은 소멸되었으나 행장은 불멸이다.

조선 왕릉은 우리만의 유산이 아니라 세계의 유산으로 격상

되었다. 국제 사회의 보호와 감시를 받게 된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우리에게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500년 역사의 타임캡슐인 조

선 왕릉을 눈과 귀,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느린 걸음으로 전시장을 돌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정지된 화면 속으로 들어가본다. 말없이 누워 있는 왕들을 깨워 권좌의 영광과 애환을 들어본다.

글이우상_소설가,동국대학교문예창작학과겸임교수|사진이한구,고성홍

이토록 강렬한, 조선왕조 500년의 압축

전 시 산 책 _ < 조 선 왕 릉 사 진 전 >

52 2010 no.08 5352 2009 no.07 53

예 술 사 용 설명 서 _ < 몬 순 프 로 젝 트 2 0 0 9 > 로 보 는 다 원 예 술

작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출현한다

무대에서 관객이 지불한 입장료로 주식을 사고 시장경제를 논하는 퍼포먼스가 있다. 이게 경제 행위일까, 예술 행위일까. 이런 공연 예술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런 ‘생쇼’를 벌이는가이다. 그러나 경계를 허물고, 순서를 파괴한 예술이 낯설지만은 않다. 우리의 삶이 그보다 더 요지경 속이기 때문이다. <몬순 프로젝트 2009>는 장르 중심의 형식적 귀결을 당연히 여기는 예술의 대척점에 서 있는 과정 중심의 예술을 모색한다. 선입견을 버리고, 이 새로운 예술의 장면들을 들여다보자.

글오세형_경기문화재단문예지원팀

작을 사무실처럼 낯선 무대에서 상연한다. 그들은 이렇게 빠르고

정신분열적인 동작을 촬영하고 영상 편집해 작품으로 만든다. 입

체파의 그림처럼 콜라주한 짧고 단속적인 동작들과는 상반된 장

중한 배경음악, 부드럽고 유려한 카메라 워크. 이런 모순적인 표현

양식은 낯설지만 독특한 감흥을 자아낸다.

라이문트 호게Raimund Hoghe(안무가)는 백남준아트센터의

야외카페 앞마당에서 ‘렉처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는 자신의 작품

여러 개를 설명하고 실연한다. 한 실연에서 그는 카페라는 사교적

이고 일상적인 공간에서 유리잔을 내려놓고는 천천히 우유를 따

른 후 잔을 조심스레 이리저리 옮겨놓고 뒤로 물러앉아 명상적으로

응시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짧은 시간 관객의 지각 활동

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의 퍼포먼스

는 사물의 이름을 지우는 행위, 규정된 공간의 긴장을 증발시키려

는 의도처럼 보인다. 카페라는 사회적이고 문화적 공간이 그저 돌

과 하늘과 바람으로 이루어진 질료와 무명의 공간으로 탈코드화해

서 보이기 시작했다. 관객은 화려한 공연을 볼 때와는 달리, 명명되

지 않은 사물과 행위를 느긋하게 유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현석과 조전환은 라이문트 호게의 퍼포먼스에 자극을 받아

공간에 관한 작업을 구상했다. 두 사람은 분석적 시각으로 접근했

는데, 언어적 구조와 물리적 구조의 만남이 ‘공간’을 실체화하는 것

이라 여기고 이 두 구조로 공간이 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업

을 하게 된다. 2009년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였던 남화연 작가는 이

라크전의 작전명인 ‘사막의 폭풍’처럼, 기의와 어울리지 않는 기표

에 관심을 가지고 코드네임을 모았다. 그녀는 코드네임으로 대본

을 만들고 작곡가 장영규, 배우, 무용수와 함께 퍼포먼스로 구성하

는 워크숍을 한다.

류한길 작가는 음악으로 특권화한 소리 체계 밖에 있는 사운드

의 세계를 추구하는 작가다. 이처럼 문화적 규정에서 배제되어왔

던 청각적인 질료들로 작업을 하며, 이번 워크숍에서는 익숙한 이

야기체의 형식 속에서 그의 작업을 담아내려고 한다.

비판적 감수성을 회복하기

한국에는 약 5년 전부터 다원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공연 예

술 언어의 확장이 시도되어왔다. 이런 경향은 서구 예술 흐름의 영

향이기도 하지만 고착화된 국내 공연 형식에 대한 변화의 시도이

기도 하다. 장르 예술 언어가 가진 지각적 스테레오 타입의 의미

작용을 멈추게 하고 잃어버린 정치적, 사회적 비판성을 회복하고

자 하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로 유럽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는

이런 다원적 경향에 대한 궁금증과 그 흐름의 방향에 대한 질문이

이번 프로젝트의 동기였다. <몬순 프로젝트 2009>는 다원 예술의

성과와 예술적 가치를 섣불리 평가하기 이전에 그 흐름의 속내와

에너지를 국내 작가와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미국 우스터 그룹에서 영상감독으로 활동했던 크리스 콘덱 Chris

Kondec은 잘나가는 국내 증권 트레이더와 인터뷰를 하며 그의 노

하우와 철학을 듣는다. 그러고는 주식시장이라는 바로미터를 비

판적으로 바라보는 좌파 경제학자와 인터뷰하며 그의 비관론을

듣는다. 연극의 재현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감상이나 취향과 관계

없는 참여 의식과 현실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더

이상 무대 위에서 ‘예술 작품’이 상연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또 내 돈(입장료)으로 주식을 사고파는 현실, 이처럼 상상과 현실

의 애매한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

익숙한 감흥의 코드를 깨기

2009년 겨울 20여 명의 안무가, 연출가, 비주얼 아티스트, 미디어

아티스트, 작곡가, 배우, 경제학자, 정체불명의 예술가들이 7~8개

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몬순 프로젝트 2009>는 위와 같은 탈장

르적 시도, 장르 간 협업을 모색해보는 워크숍이다. 무용과 연극 등

의 장르 예술에 가해진 해체적 에너지의 밀도와 온도를 재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현실에 가까운 연기라는 고전적 도구가 아니라

현실 자체를 작품에 들여오는 연출가, 음악을 구축하기보다는 소

리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음악가, 연극적 양식을 해체하고 음악적

으로 재구성하는 비주얼 아티스트들이, 장르 중심적인 방법론을

버리고 그들의 작업 재료와 취급 방법을 찾는 과정 속에서 고유한

표현 방법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작가들은 중간발표와 프

레젠테이션을 통해 작업의 고민을 공유하고 그룹으로 작업을 한

다. 실제로 실현하기 힘든 아이디어들도 있지만 과정 자체만으로

도 서로에게 많은 자극이 된다. 실현 가능성이 높은 작품들은 추

후 공연으로 제작된다. 캐서린 설리반Catheline Sullivan과 숀 그리

핀Sean Griffin은 유명 극단의 작품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

을 한다. 예를 들어 19세기의 유명한 등장인물의 전형적 동작을 배

우가 초 단위로 재구성해서 기계적으로 동작한다. 처음에는 14초

동안 14가지의 동작을 구성하는 워크숍을 통해 배우와 훈련을 시

작한다. 이 과정을 거쳐 여러 명의 배우가 96비트로 이루어진 동2

54 2010 no.08 55

문 화현 장 _ 새 터민 문 예 창 작

그리운 이름을 부르며 치유는 시작된다

타자를 발견하는 것. 인간이기 때문에 공유하는 내적 세계에 눈뜨

며 예술은 결국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가에 천착하게 된다. 기억 속

에 떠오르는 얼굴들을 더듬으며 가다보니 어느새 경기도제2청사

에 도착해 1층 로비 한쪽에 수줍은 듯 자리하고 있는 시화詩畵와

마주친다.

간절한 그리움들이 터져 나오다

11월 9일부터 13일까지 5일간 이곳에서는 ‘북한 이탈 주민 문예창

작 대회’ 수상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통일부의 후원으로 경기도가

주최하고 경기문화재단이 주관한 이번 공모는 ‘통일 염원 및 남한

사회의 성공적 정착’을 주제로 북한 생활 등을 그린 수필, 시, 그림

이 288편 출품됐고 그중 30편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창작 대회 그림 부문 최우수 수상작 <중간 지점>은 남과 북의

국기를 들추고 일어나려는 아기의 모습에서 통일에의 염원을 드러

냈다. 우수작 <집 떠난 아빠 엄마를 기다리며>에는 뼈만 앙상한 아

이가 그려져 있는데 그 눈망울에 슬픔과 간절한 그리움이 드러나

있다. 수상작 <가을밤 기러기>, <호랑이>에도 그 바탕에 깔린 정서

역시 그리움이었다.

“가까운 그곳, 먼 길 돌아갑니다. / 조그마한 꼬장떡 하나 주머

니 속에 있고 / 두세 번씩 깁고 기워 기울 곳 없는, / 해어진 양말에

해어진 지하족 신고 / 국경의 강으로 갑니다. / (중략) / 어둠 속에

밀려온 깊은 물속에 / 누군가 먼저 던져 넣은 슬픔 속 / 뼈 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강물 속으로 / 동트기 전 고요한 새벽에 / 내 몸도

강물 속으로 던져집니다.” <강>, 김성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생각하노라니 김동환의 장시 <국경의

밤>이 떠오른다. 그 시가 쓰인 이전에도 강은 흘렀고 여전히 흐르

고 있고 앞으로도 흐를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강물에 몸을

담그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만약 국경에 꽃이 핀다면 그

꽃은 고난으로 인한 상처로 피범벅 된 꽃일 것이다.

시를 읽다 보니 압록강과 두만강 물소리가 귓속을 파고들며 먹

먹하게 만들고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물이 뇌와 심장을 적시는 것

같다. 사랑하는 이의 귀가를 맘 졸이며 기다리는 여인의 한숨이 짙

게 들린다. 인위적인 경계선을 온몸으로 지우며 사는 사람들.

“바늘처럼 일어서는 머리칼, / 겁에 질린 심장은 어느새 / 저만

치 달아나고 있다 / (중략) / 가슴 치는 물속에서 손 맞잡은 사람

들 /물살에 떠밀리며 밀리듯 건너갔다 / (중략) / 달빛과 경주하는

사람들 / 한 뜸 두 뜸 황금실로 자유를 수놓으며 / 오늘 밤도 달빛

이 두렵기만 하다.” <달빛에 숨은 사람들>, 김경주

문학은 호명하는 행위이다. 일찍이 윤동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패, 경, 옥, 그리운 이름을 불러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호명의

행위 속에 이미 상처 치유의 길은 마련되어 있다. 스스로의 삶을

보듬고 타인과 공유하고 소통하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

전시장에는 민원인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작품을 둘러보는 사람들의 가슴마다 이들에 대한 관심이 싹트고

새로운 인식의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해본다. 그래야 북한 이탈

주민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동질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이 이번 전시회의 개최 목적이기도

하다.

전시 공간이 일반인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으

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귀가를 서두른다. 덜커덩거리는 전철의

소음과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문예창작대회 작품집을 펼친다.

“자유를 찾아온 나에게 이 땅은 배고픔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

었고,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인종 차별이란 아픈 상처를 남겨

주었다.” <지하철이 내게 건네던 말>, 이광진

건너오는 과정뿐 아니라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마음의 고초

가 심한 이들. 과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입선작의 한

구절이 대답을 한다. “이제 나의 앞길에는 언제나 끝없는 희망과

꿈이 펼쳐져 있다. 마음껏 나래를 펴고 그 꿈과 희망을 펼쳐보련

다.” <삶을 위해 돌아온 길>, 백은선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수원에서 두 시간 남짓 버스에서 흔들리는

동안 나는 그새 멀미가 나고 힘들었다. 이 짧고 편한 여행에도 몸

이 힘들다고 신호를 보내오는데 국경선을 넘어온 사람들의 고초는

어떠했을까.

북한 이탈 청소년들의 배움터인 한겨레학교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둠의 탯줄을 잘라 먹고 새날의 씨앗이 되기를 소망했

던 아이들. 지금도 여전히 내면에 두만강의 바람과 압록강의 거센

물결, 서해의 밀물과 썰물이 흐르고 있을까. 수업이 진행되는 동

안 나는 내 안의 강과 사막, 경계선을 숱하게 넘나들었고, 그 경계

선들이 지워지는 체험을 했다. 타자 속의 나를 발견하고 우리 속의

북한 이탈 주민에게 문예 창작은 탈북 과정에서 겪었을 상처와 정착 과정에서 겪고 있는 소외, 그리고 문화적 충격을 치유하는 행위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리움을 몸 바깥으로 터뜨리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터져 나온 목소리를 모른체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다.

글박설희_시인|사진고성홍

56 2010 no.08 57

문 화현 장 _ 남 한 산 성 솔 바 람 책 방

배영환의 책방, 남한산성에 오르다

‘솔바람 책방’은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의 염원과 정성 그리고 노동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남한산성과 닮았다. 누군가는 책을 기증하고, 누군가는 음식을 장만하고, 누군가는 사무용품을 내놓았다. 한 사람의 힘은 크지 않지만, 합치고 합쳐 솔바람 향기 가득한 책방을 완성했다.

글김수정_경기문화재단문화홍보팀|사진고성홍

궂은 날씨에도 많은 사람이 개원식에 참

석했다. 책방 운영을 맡은 산성리 마을회, 발

전위원회, 남한산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을 비

롯해 광주문화원,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도립공원 관리사무소 관계자 등 남한산성과

인연이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인연은 고스란히 책방과도 연결됐다. 이들은

책과 컴퓨터, 사무용품, 운영비를 기증했다.

개원식 당일에도 운영위원회 사람들의 손이

꽤나 분주했는데, 아직 책방의 ‘이름표(책등

에 붙이는 스티커)’를 달지 않은 책이 수북하

게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헐렁한 책

장이지만, 이런 관심이 이어진다면 머지않아

빽빽한 책장을 만날 수 있겠다.

독서는 기본, 활동은 선택

남한산성 내에는 남한산초등학교 도서관이 하나 있다. 그래서 솔

바람 책방은 주민을 위한 책방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일

차적인 목표로 잡는다. 학교 도서관은 주민에게 심리적 거리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6시 이후에는 문을 닫기 때문이다. 솔바람 책방

은 저녁 시간에도 책방을 이용할 수 있도록 9시까지 열려 있다. 또

책방이 책을 읽는 공간만이 아니라 사랑방,

공부방, 교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개관에 맞

춰 역사와 생태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의 패권 다툼, 고려

시대의 몽고군 침입, 조선시대의 청나라 침입,

조선 말 경기의병 투쟁 등의 굵직한 사건들

을 겪은 곳으로, 마을의 역사만으로도 한국

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에 진

하게 기록된 사건 외에도, 어른들이 기억하

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직접 들어보고, 사진

도 찍고, 자료도 조사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예정이라고 하니, 생생한 지역사가 담긴 책

한 권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된다.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 생태 탐방> 프로

그램을 통해 남한산 계곡 주변에 서식하는

개구리, 도롱뇽, 가재 등과 남한산 숲의 꿩, 박새, 어치 등 생물의 서

식 및 생태 환경을 탐사할 예정이다. 이런 활동을 통해 남한산성의

가치를 알게 되고, 지역에 관한 관심과 자부심도 커질 것이다.

솔바람 책방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이 지금처럼만 지속된다면,

솔바람 책방의 이야기도 남한산성의 역사서 한쪽에 기록될 수 있

지 않을까?

겨울비로 남한산성이 촉촉하다. 바람이 차서 코트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징이 울린다. 남한산초등학교 풍물패는 추위

에 아랑곳하지 않고 길놀이에 열심이다.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는

곳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몰

려드니 마을 잔치가 열린 듯했다. 남한산성에 놀러 왔다가 사물놀

이 소리를 듣고 이 자리에 왔다는 사람들도 주민들 틈에 자연스럽

게 섞여 자리를 즐겼다. 11월 25일, 솔바람 책방은 남한산성에 모

인 이들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했다.

변신, 합체, 이동이 자유로운 책방

솔바람 책방은 배영환 작가의 공공미술 작품이다. 미술가의 ‘작품’

이지만, 쓰임새는 여느 책방보다 알차고 너르다. 달리 ‘공공’ 미술

이겠는가.

먼저 책방의 모양새를 살펴보자. 크기가 다른 두 채의 컨테이

너 박스로 만들어진 책방은, 철제 프레임을 산뜻한 주황색으로 칠

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고, 나무가 많은 주변 경관과도 잘 어울

린다. 또 벽면 전체를 유리창으로 만들어 남한산성의 빼어난 자연

을 고스란히 담았다. 컨테이너라는 소재가 지닌 육중함이나 차가

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경기도미술관에 처음 설치되어 관람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

고 그 후 경기문화재단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배영환의 컨

테이너 도서관 프로젝트’는 현재 시흥, 남양주, 수원, 양평, 그리고

남한산성에 책방 배달을 완료한 상태다.

이 다섯 개의 책방은 전체적인 모양새는 비슷하지만, 이름과

분위기는 제각각이다. 책방이 품고 있는 지역과의 어우러짐이 다

르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솔바람 책방은 산이 책방을 보듬고 있는

모습이라 유난히 아늑한 느낌이다. 책방 내부는 책장과 책상, 의자,

스크린 그리고 냉난방 시설이 설치되어 사계절 모두 사용이 가능

하다. 겨울비로 기온이 많이 떨어졌지만, 함께 책을 보는 이들의 체

온이 더해지니 책방 안은 제법 훈훈했다. 사물놀이 소리가 잦아들

자 따뜻한 책방에 있던 이들도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58 2010 no.08 59

문 화현 장 _ 꿈 꾸 는 아 이 들의 축 제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음악 학교 교사인 레나르 아코스타는

유년 시절 빈민촌의 문제아였다. 소매치기와 마약 거래로 아홉 번

이나 경찰에 체포됐다. 하지만 ‘엘 시스테마El Sistema’에 들어가 클

라리넷을 배우면서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 악기를 받

았을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아코스타는 “저한테 악기를 맡기

고도 도둑맞지 않을 거라고 믿는 바보가 있다니 놀라웠다”며 “손

에 잡힌 클라리넷 촉감이 총보다 훨씬 더 좋았다”고 회상했다.

거위의 꿈을 꾸는 아이들

지난해 11월 7일 경기도문화의전당 소공연장에서는 경기문화재단

이 주최하고 문화예술교육연구소 ‘에이스벤추라’가 주관한 <꿈꾸

는 아이들의 축제>가 열렸다. 이날 축제에서는 지난 2007년부터 3

년 동안 경기도 내 영구 임대 아파트 단지의 16개 사회복지관에서

진행된 ‘청소년 문화예술 활동 지원’ 시범 사업을 통해 탄생한 청

소년 음악가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공연 직

전까지 로비 여기저기에서 연습에 몰두해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어찌나 진지한지 옆에서 혹시나 방해가 될까 싶어 조심스러울 지

경이었다.

어두운 객석 자리에 앉아 연주회가 시작되길 기다리는데, 머

릿속에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Adolfo

Dudamel Ramírez. 2008년 12월,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가 키

워낸 젊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

라는 젊은 열정과 폭발적인 힘으로 국내 관객을 열광시킨 바 있다.

악기라고는 평생 구경 한번 못하고,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비정한 뒷골목에서 고달픈 인생을 살 수도 있었을 그들을, 음악의

위대한 힘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로 만들어놓았다. 생각의

고리가 여기까지 이어지자 나도 모르게 그때의 감흥이 되살아나

기회의 문이 넓어지면 더 많은 꿈이 그 길을 지나간다

한국의 클래식 악기 수업은 좁은 문 안쪽에서 이루어진다. 이 문을 넓혀 더 많은 아이가 그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2009년 11월 7일 경기도문화의전당 소공연장에서는 한국판 ‘엘 시스테마’ 운동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글윤철원_<경기일보>문화부기자|사진이학성_경기문화재단문화홍보팀

총보다 악기! 베네수엘라의 무상 음악 교육 시스템 ‘엘 시스테마’‘엘시스테마 el sistema’는30여년전베네수엘라의호세안토니오아브레우

José Antonio Abreu라는무모한이상주의자가만들어낸베네수엘라의무상음악

교육시스템이다.어릴때부터악기가아니라총이더익숙할만큼위험한거

리에서성장하는아이들이,총이아니라악기를손에쥐면서부터서서히변

화한이드라마같은실화는다큐멘터리영화(2008)로도만들어졌다.‘엘

시스테마’는28세의지휘자구스타보두다멜과17세의나이에역대최연소

베를린필하모닉단원이된에딕슨루이즈등,유럽에서가장촉망받는젊은

음악가들을배출하면서전세계적으로그이름을알리게됐다.영화는아브

레우의아름다운아이디어가폭력과가난의거리에서어떻게아이들을구

원했는지,음악이어떻게아이들의삶을변화시켰는지를보여준다.

다소 흥분된 기분으로 연주회를 기다렸다.

성남 중탑종합사회복지관 ‘Do Dream!’ 팀의 신나는 난타 공

연으로 시작한 연주회는 바이올린, 피아노, 플루트, 기타, 아코디언,

하모니카, 오카리나, 해금, 가야금 등의 다채로운 연주로 이어졌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휘에 따라 곡을 연주해나갔다. 긴장한 탓에

작은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도전에 대한 흥분과 설렘이 묻

어나는 연주에서 그런 실수는 귀엽기까지 했다. 지금 이들에게 완

벽하고 정교한 연주를 기대한 청중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

올린으로 느릿느릿, 느림보 미뉴에트를 연주하는 두 아이의 모습

에서 나는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와 멋지게 바이올린 협주를 하는

이 아이들의 20년 뒤 모습을 상상해본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리라.

음악인이 되지 않아도 좋아

우주비행사의 꿈을 이루기 위한 고된 공부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

해 더 열심히 북을 두드린다는 아이. 복지관에서 배운 플루트로

반에서 유일한 플루트 연주자가 되어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

아졌다는 아이. 악기 수업을 통해 헤어디자이너의 꿈 대신 연주를

가르치는 음악 선생님을 꿈꾸게 된 아이.

이 아이들은 음악 천재가 아닐 수도 있고, 음악에 소질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음악 영재 발굴과 육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최대 약점이라

고 할 수 있는 ‘기회의 좁은 문’을 조금 더 넓혀보자는 데 있다. 우

리 사회에서 경제적 소외는 문화적 소외로 이어진다. 생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별도의 음악 교육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유롭게 악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더 나아가 오랜 시간

연습한 결과를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발표할 수 있는 자리가 생

기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음악은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은 마음을 여는 기회도

만들어준다. 그것이야말로 음악의 위대한 힘이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60 2010 no.08 61

문 화+기업 _ 삼 성 생 명 흰 개 미 탐 지 견 활 동

흰개미, 조사하면 다 나와!

국민 견공 상근이도 부럽지 않다

탐지견의 활동은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지킴이’ 상을 줄 정도로 대

단하다. 탐지견으로 활동하는 견공은 보상에 대해 집착하도록 훈

련받기 때문에 제대로 보상을 해줘야 그다음 탐지 활동에 적극적

으로 임한다. 열심히 일한 견공들에게는 어떤 상을 줄까? 좋아하

는 공이나 수건 뭉치 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훈련사가 놀아주는 것

이 선물이다. 어릴 때부터 훈련사가 함께 놀아주며, 개가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찾아내 그것을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아하도록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보상에 대한 집착이 클수록 임무를 더 잘

수행해낸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특한 일을 하는 것이지만, 개의

입장에서는 임무 자체가 하나의 게임이기 때문에, 정확한 보상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탐지견도 출퇴근이 있고, 휴가와 보너스가 있다. 그리고 은퇴

도 있다. 늙어 감각이 무뎌지면 일처리 능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현

장에서 물러난다. 은퇴 후에는 일반 가정에서 따뜻한 보살핌을 받

으며 노후 생활을 보낸다.

삼성그룹에서는 문화재의 흰개미를 찾아내는 탐지견뿐 아니

라 훈련을 받은 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각 계열사별로 활

동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에서는 청각 장애인을 돕는 청각 도우

미견을, 삼성화재에서는 시각장애인을 돕는 안내견을, 에버랜드에

서는 개와의 교감을 통해 사회성을 도모하거나 재활 치료를 돕는

치료 도우미견을, 삼성생명에서는 소중한 생명을 구하는 인명구조

견과 마약, 폭발물, 해충으로부터 인간이나 문화재를 지키는 탐지

견 활동을 통해 사회 공헌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몸이 불편한 사람 곁에서 도움을 주는 개가 있다. 장애물을 보면

멈춰 서고, 계단이나 지하철 개찰구에서는 주인을 안내한다. 사람

의 눈 역할을 하는 안내견은 삼성에서 1993년부터 운영해오고 있

는 공익 서비스다. 안내견이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면, 탐지견은 문

화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사람보다 만 배 이상 발달한 후각을 이

용해 쉽게 해충을 찾아낸다. 킁킁, 탐지견의 코가 지나간 자리는

해충 박멸이다.

끈기 있는 개만이 탐지견이 될 수 있다

‘탐지견’이란 제대로 된 훈련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명함이다. 뛰어

난 후각 실력만 믿고 덤볐다가는 큰코다친다. 탐지견이 되기 위해

서는 기본적으로 강한 의욕과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문화재가 전

국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낯선 환경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넉살

이 있다면 더없이 좋다. 흰개미가 내뿜는 페로몬을 구별해내는 능

력도 길러야 한다. 볼펜 잉크 냄새와 비슷하기 때문에 흰개미조차

도 볼펜으로 선을 그으면 자신들의 냄새로 착각해 선을 따라 이동

한다고 한다. 탐지견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구별해낸다.

훈련을 통해 기본 자질을 갖춘 후에는 본격적으로 훈련사와

호흡을 맞추게 된다. 흰개미 박멸 활동에서는 탐지견과 훈련사의

호흡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탐지견센터의 흰개미 탐지견은 2006년 말부터 활동

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서울 5대 궁을 비롯해 전국의 사찰, 향교,

왕릉 정자각 등의 목조 문화재에서 활동을 벌여왔다. 흰개미는 습

하고 따뜻하며 어두운 곳을 좋아해 보통 4월에서 10월 사이에 활

발하게 활동한다. 최근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점점 상승하는 기

온 때문에 피해 또한 커지고 있어, 탐지견의 활동 역시 많아졌다.

흰개미는 보통 목조 문화재 기둥 아래쪽부터 갉아먹기 시작해 위

쪽으로 이동하며 피해를 확산시킨다. 해충에 의한 목조 문화재의

피해를 확인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서는 해체와 같은 복잡한 과정

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흰개미 유무를 먼저 탐지하는 탐지견들의

활약은 더욱더 소중할 수밖에 없다.

비를 견디고 바람을 견디고 추위를 견딘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렇게 견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문화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수많은 위험과 고비를 넘긴 문화재는 이제 흰개미를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흰개미 탐지견이 있어 그 걱정을 덜 수 있을 듯싶다.

글강혜란_경기문화재단문화홍보팀│사진_삼성생명탐지견센터제공

62 2010 no.08 63

직설적인축소,스페인의 미크로폴리스 어린이교육공원 www.micropolix.com

어린이는 어른의 세계를 동경한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기를 소

망한다. 어른의 도시를 모양새는 물론, 규칙까지 그대로 옮겨 어린

이들을 흥분하게 만드는 축소판 도시가 있다. 마드리드 외곽 도시

인 산 세바스티안 데 로스 레예스San Sebastián de los Reyes에 위치

한 실내 어린이교육공원 미크로폴리스. 2008년 12월에 개장해 첫

해 예상 관람객인 30만 명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소도시에는 시청, 경찰서, 소방서, 병원, 대학, 도서관, 신문

사,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국, 극장, 재활용 센터, 슈퍼마켓, 갤러리,

영화제작소, 패션쇼장, 건강 연구소, 택배 서비스 센터, 자동차 학

원, 주유소, 주행 도로 등 54개의 테마 체험 공간이 있다. 그 안에

서 아이들은 공무원, 경찰, 의사, 간호원, 학생, 연구원, 기자, 모델,

슈퍼마켓 점원, 파일럿, 배우, 카메라맨 등에 이르기까지 100여 개

의 다양한 직업을 체험해볼 수 있다.

미크로폴리스에 입장한 어린이는 시내 지도, 안전을 위한 신분

증명 팔찌, 여권, 100에우릭스Eurix(미크로폴리스 도시의 화폐단

위)에 해당하는 수표를 받는다. 여권에는 참여한 모든 활동을 기

록하며, 100에우릭스의 수표는 은행에 가서 본인의 계좌를 열고

입금한 후 현금으로 찾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자동차 운전의 경우, 운전면허증을

따기 위해서는 다섯 군데의 체험 공간을 거쳐야 한다. 먼저, 자동

차 학원에서 운전 규칙과 안전

규칙을 배워 필기시험을 치른다.

자동차 시뮬레이션을 통

해 실기 시험에 합격하

면 시청에서 운전 면허

증을 발급받는다. 면허

증 취득 후, 자동차 보

험을 들고 차를 빌리는 데 드

는 총 비용은 109에우릭스다. 처음 도시에

입장할 때 주어지는 100에우릭스를 초과하는 금액으

로, 운전을 원하는 어린이는 직업을 구해 일을 해서 나머지 금액을

채워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면 1인승 전기 자동차를 운전

할 수 있는데, 차는 시속 15킬로미터로 달리며 미크로폴리스 공식

스폰서인 아우디가 제공한다. 운전은 주행 도로에서만 가능한데,

설치된 신호등, 횡단보도, 주유소 서비스 등이 실제 도로를 방불케

하며, 운전 법령은 실제 자동차 운전 포인트 제도와 같다.

미크로폴리스 설립자 요안 테이시도Joan Teixido는 ‘노는 것은

어린이의 특권이자 의무’라고 말한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미크

로폴리스는 놀이와 배움의 균형을 잃지 않고자 한다. 어린이는 역

할 놀이를 통해서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과 책임감

을 배우고 자긍심을 높이며 자연환경 보호, 건강한 식습관 등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깨달으며,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성장한다.

홍현숙_경기문화재단스페인통신원

깜찍한축소,네덜란드의 마두로담 어린이박물관 www.madurodam.nl

해 외 통 신 원 리 포 트 _ 네 덜란 드·스 페 인

마두로담Madurodam 어린이박물관에 가면 네덜란드 전역의 도시

를 1:25의 비율로 축소해놓은 미니어처 도시를 볼 수 있다. 네덜란

드의 운하, 풍차 등은 물론 국제공항, 의회, 궁전 등과 같은 주요 건

물들을 정교하게 재현했다. 방문객은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

인국에 온 듯한 기분이 된다.

마두로담 어린이박물관은 1952년 7월에 설립되었다. 제2차 세

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마두로 부

부의 아들인 조지George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

다. 1996년 이래, 미니어처로 지은 도시 규모가 확장되면서 매년

10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가는 네덜란드의 명소가 되었다.

마두로담 어린이박물관은 이런 볼거리 말고도 독특한 프로

그램으로 유명하다. 1952년 설립 당시에 만들어진 ‘Youth City

Council’은 이곳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이다. 지금의 네덜란드 여왕

인 베아트릭스Beatrix가 당시 14살의 나이로 마두로담의 시장 직

을 맡으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Youth City Council’은 헤이그 시의 25명 학생들로 구성된다.

시장과 임원들의 임기는 2년이며, 베아트릭스 여왕이 시장 임기를

마친 1980년부터는 이들 위원회에서 선거를 통해 자율적으로 시

장을 직접 뽑고 있다. 시장과 임원들은 마두로담에서 열리는 모든

공식 행사와 행정 업무에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2009년 9월 21일, 헤이그에서 열린 세계 평화의 날을 기념하

여, 이들은 ‘공식 행사’의 일환으로 1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시가

행진을 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마두로담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준다. 학교의 크고 작은 행정에까

지 학생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을 의무화한 이 나라의 환경에서

는 학생들이 운영하는 시의회가 따로 있다는 것도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회 복지를 위해 박물관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국내

외 지원 펀드도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프로그램. 이들이 운영

하고 있는 사회 지원 펀드가 무려 6개에 이른다. 이는 어린이와 청

소년은 물론, 장애인에 대한 지원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마두로담

어린이박물관의 원동력은 이처럼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에서 비롯

되는 건지도 모른다.

황유정_경기문화재단네덜란드통신원

이 작은 도시들, 유쾌하거나 신랄하거나

미니어처는 현실의 불편한 냄새를 휘발시킨다. 축소의 힘이다. 그래서 미니어처는 아이들의 장난감이자 교육용품, 어른들의 가벼운 구경거리가 된다. 도시를 작게 모형화한 네덜란드 마두로담 어린이박물관과 가상의 소도시를 만들어 어른의 생활을 유쾌하게 배우는 스페인의 미크로폴리스 어린이교육공원. 이 작은 도시는 현실을 비추는 매서운 거울이 된다. 역시 축소의 힘이다.

2009 no.07 63

64 2010 no.08 65

꽃잎과 팝콘은 둘 다 가볍다.

하지만 세상이 매긴 이들의 무게는 다르다.

의미는 사물에서 저절로 나오지 않고 사람들이 만들어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긴 겨울을 헤치고 꽃잎을 피워낸다 해서 인고의 상징이 된 눈 속의 매화와 3분 만에 후딱 만들어지는 팝콘이 잠깐 자리를 바꿔보았다.

팝콘이 그림 속 매화 자리에 옮겨 앉아 경박함의 굴레를 벗고 약간의 품위를 얻었다.

동시에 옛 그림 속의 매화는 사진 속으로 자리를 옮겨 훌쩍 가벼워지고 명랑해졌다.

구성연은동국대인도철학과와서울예술대학교사진과를졸업했다.

2000년첫개인전에서<나비>시리즈를발표했고,

이후<유리>(2001),<모래>(2004),<화분>(2005),<팝콘>(2007)시리즈등을작업했다.

2009년에는트렁크갤러리에서<사탕>시리즈로일곱번째개인전을열었다.

다수의단체전에참가하며꾸준히작업하고있다.

사 진 에 세 이 _구 성연 의 시 선

명랑한 매화, 우아한 팝콘

팝콘 시리즈 | 120x150cm | 2007 © 구성연

팝콘 시리즈 | 35x70cm | 2007 © 구성연

경 기 문 화 소 식

ReVIeW

66 2009 no.07 67

경기도미술관에설치된강익중작가의<5만의창,미래의벽>프로젝트는5만명의어린이가

참여해만든작품이다.우리나라최남단마라도분교의어린이도,DMZ안에위치한대성초

등학교의어린이도함께참여했다.다문화가정의어린이도,외국인근로자의자녀도,세계

각국에퍼져살고있는교포가정의어린이도함께그림을그렸다.강익중작가는5만개의

작품을다시하나의작품으로만들기위해경기도미술관벽면에백두에서한라까지우리나

라산하를형상화한바탕그림을그렸다.교사,학생,군인등이자원봉사자로나섰고,어린

이벽화연구회,씨알모임,경기도미술관등이함께거들어벽화를만들었다.2008년9월의

일이다.

그러나이걸로끝이아니다.그림을그린어린이들이성장하면,벽화도변해야한다고작가

는생각했고,이를‘달리는기차’로표현했다.역동적인오브제와다양한영상작업등을추

가로제작해설치했다.강익중작가의리터치작업을통해변화한벽화는,2008년에그림을

그렸던안산다문화가정어린이들이가장먼저감상했다.아이들을위한마임공연과마술

공연등도마련되었는데,아이들은자신이참여한작품에더관심을보였다.2009년12월

의일이다.아이들의성장이멈추지않는다면,벽화의진화도계속되지않을까.

남한산성은통일신라시대부터지금까지천혜의요새로,임금의피난처로,삶의터전으로,

쉼터로우리를지키고보듬어왔다.1500년의시간을간직한남한산성이최근에는글로,그

림으로,노래로표현되어많은이들에게강한인상을남기고있다.그영향일까.휴일이면보

통만명정도가남한산성을찾는다고한다.옛흔적을좇아,소나무향기를맡으러,걷기편

한길이있어남한산성을방문했다는이들.사진을찍기위한목적으로남한산성에왔다는

이들도적지않다.이들이표현한남한산성의모습을한눈에볼수있는<남한산성전국사진

공모>전시가2009년11월침괘정에서있었다.

대상은산성의굽은모습을잘표현한장호성씨의<산성순례>가받았다.적군의침입으로부

터보호하기위해산중턱에산성을쌓아올린이들의결연한마음이잘드러나는작품이었

다.성곽뿐아니라행궁,수어장대,연무관등의문화유적과풍물공연,도당굿제등의행사

모습,산성의사계등날마다올라도운이좋아야볼수있는행사를사진으로볼수있는자

리였다.

●대상을받은장호성의<산성순례>

2009년11월28일부터12월13일까지백남준아트센터에서열린<아트링크프

로젝트2009-관계의드로잉>전의시작은2008년여름으로거슬러올라간다.

경기도내장애인문화예술프로그램담당자들과함께한<일본의장애인문화

예술공간연수>를통해경기문화재단은일본의민들레의집과인연을맺었다.

민들레의집은장애와예술을결합한새로운복지개념을구현하고있는일본

의장애인예술공간으로,이곳에서운영하는하나아트센터를방문하게되면

서<아트링크프로젝트2009>의구체적인가닥들이잡히기시작했다.

그리하여2009년여름,김월식,김지섭,손한샘,송미경,최혜정작가가민들레

의집레지던시프로그램을이용해3주간머물면서작업을하게된다.아트링크

는하나아트센터가진행해오고있던프로젝트로,장애인과아티스트가일대

일로협업해작품을만든다.그과정과결과가바로<아트링크프로젝트2009-

관계의드로잉>전이다.

여기서협업의의미는공동으로무언가를만드는물리적이고물질적인것에있

는것이아니라,두사람사이의관계를통한창조에있다.그러므로작품들은

매우사적이고,개념적인것에가깝다.

김월식작가와지적장애인소가메후미코의작품<후미코컴퍼니-그녀의손바

닥>은영상도설치도아닌실재하는컴퍼니(여행사)가작품이다.이컴퍼니는

후미코가김월식작가에게저녁식사를제안하면서우연히만들어졌다.김월

식작가는후미코의집에서초밥을먹고함께동네구경에나섰다.시장을둘러

본뒤,금붕어가게에서금붕어잡기시합을하고,빙수가게에서시럽을뿌려

빙수를먹고,후미코가다니던초등학교에서교감선생님을만나인사하고교

실을둘러본뒤,신사에서행운점을보고,모스햄버거가게에서간식을먹는코

스를후미코는작가에게소개했다.

후미코의동네투어는매우개인적인코스이면서도어디서도경험할수없는

독특하고재미있는것이었다.작가는후미코가<후미코컴퍼니>여행사의사장

이된다면,이후민들레의집에오는모든손님에게자신이경험한‘후미코투

어’의즐거움을맛보게해줄수있을것이라는생각이들었다.작가는후미코에

게진짜컴퍼니를제안해그녀의이름이새겨진명함,로고,여행사깃발,가방

등을만들어주었다.그렇게후미코는사장님이되었다.

장애인과아티스트의만남은‘에이블아트(가능성의예술)’의폭을확장시킨다.

장애인의표현활동그자체를새로운예술로인식한것이에이블아트였다면,

아트링크프로젝트는장애인과아티스트의관계로부터태어나는새로운현대

미술이다.매우사적이고,잘보이지않고,말할수없는관계에서비롯되는이

예술의형태는지나치게공적이고,물질적이며,스펙터클하기까지한동시대

미술의안티테제임에틀림없다.

글김희경_아트링크프로젝트큐레이터|사진고성홍

삶도예술도모두관계일뿐이다<아트링크 프로젝트 2009-관계의 드로잉>전

성장하는어린이,진화하는벽화 <5만의 창, 미래의 벽> 리뉴얼

사진으로붙잡은산성의매력 <남한산성 전국사진공모전>

경 기 문 화 소 식

neWs | MUseUM PLAY + FestIVAL | neWs

68 2009 no.07 69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

전세계에서성경다음으로많이팔렸다는세르반

테스의명작<돈키호테>가뮤지컬로재탄생했다.뮤

지컬<맨오브라만차>는명실상부한브로드웨이의

걸작으로,국립극장에서초연되어당시완성도높

은드라마와가슴을울리는음악,배우들의열연으

로관객과평단모두로부터최고의무대라는극찬

을받았다.돈키호테역에는류정한과정성화,알돈

자역에는이혜경과김선영이더블캐스팅되었다.

1월14일~17일|고양아람누리

문의1577-7766|www.artgy.or.kr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

<사랑에속고돈에울고>는<홍도야우지마라>라

는제목으로널리알려진악극을새롭게재구성한

작품이다.이번작품은원작의순수한사랑과희생

이라는테마를현대적으로재해석했으며춤과노

래등은좀더화려하게꾸며볼거리를더했다.최주

봉,김혜영,이대로,이한수등국내연극계스타들

이출연한다.어르신들에게는지나간추억을되새

기며즐거움을찾고,젊은세대들은그동안자주접

하지못한악극에대한색다른재미를경험할수있

는기회가될것이다.

2월15일|성남시민회관

문의031-783-8000|www.snart.or.kr

<소프라노 신영옥 초청 신년 음악회> ***

현재뉴욕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의주역가수로

활동하고있는소프라노신영옥의신년음악회가

열린다.이번공연에서는지휘자여자경과군포프

라임필오케스트라와함께하며,새타령,뱃노래등

의한국민요도함께들을수있다.

1월16일|군포시문화예술회관

문의031-390-3501|www.gunpoart.net

<자라섬 씽씽 겨울바람 축제> ****

자라섬이이번겨울에는거대한얼음축제의공간으

로변신한다.신나는겨울놀이와정취를만끽할수

있는자라섬씽씽겨울축제가가평군에서펼쳐진

다.얼음낚시,전통썰매,별자리관측등의체험으

로움츠러든몸과마음에기운을불어넣는프로그

램이다.체험비는‘가평사랑상품권’으로돌려받는

데이상품권은마트나음식점등에서사용할수있

다.매주주말에는연인과가족을위한재즈,마술

등의공연이펼쳐져축제의흥미를더해줄것이다.

1월9일~31일|자라섬및가평천일대

문의031-581-2813|www.jazzcenter.co.kr/singsing

<임진강 민속 축제> *****

설과정월대보름을맞이해온국민의염원인통일

을기원하고전통민속놀이를즐길수있는축제가

열린다.파주임진강변에서열리는민속놀이한마

당으로연만들기와날리기,짚풀공예품만들기,

윷놀이등의민속놀이를경험해볼수있다.오곡밥

과나물밥등의전통음식판매장과호두,땅콩등

부럼을판매하는장터도개설될예정이다.

2월28일|파주임진각평화누리

문의031-941-2425|www.pajucc.or.kr

<세바스치앙 살가두 ‘AFRICA’>전 *

20세기최고의다큐멘터리사진가세바스치앙살

가두의사진은단순히보도와기록이라는다큐멘

터리사진의특성을넘어서지역과계층을막론하

고인류에게감동을주는휴머니즘을지닌예술작

품으로평가받는다.세바스치앙살가두의최신작

품들을볼수있는이번전시에서는그가촬영한아

프리카사진중에서100점을엄선했다.그는“아프

리카의모습을찍은사진을통해동정심이일어났

다면내사진을잘못이해하고있다”고말한다.지

구상가장어두운곳까지사랑으로담아낸살가두

의사진을통해다큐멘터리사진의정수를느낄수

있을것이다.

1월6일~2월28일|고양아람누리아람미술관

문의031-960-0180|www.artgy.or.kr

<한향림 옹기박물관 소품관 2010 상설 전시>전 **

옹기는질그릇과오지그릇을아울러이르는말로,

한국인은전통적으로옹기를조미료와주식물과

부식물의저장용구,주류발효도구등으로사용해

왔다.그러나1960년대말부터신소재가등장하고

생활문화가변화하면서옹기문화는점점쇠퇴했

다.한향림옹기박물관에서는조선후기부터1950

년대이전까지제작해사용하던조선시대의옹기

를전시함으로써사라져가는우리옹기의쓰임새와

아름다움을현대적시각으로재조명하고자한다.

2009년12월31일~2010년12월31일|헤이리한향림옹기박

물관|문의031-948-1001|www.heyrigallery.com

<놀이와 예술은 친구>전 ***

국내유명작가의회화와조각작품,그리고작가가

생각하는놀이로꾸며진체험공간을통해일반인

이현대미술을유쾌하게즐길수있는전시다.어린

시절의놀이로자신의조형세계를구축한작품,작

가의상상력으로재탄생한놀이를소개한다.전시

외에도상상력을자극하는다양한체험행사가마

련되어있다.

2009년12월24일~2010년2월28일|장흥아트파크

문의031-877-0500|www.artpark.co.kr

어린이 교육프로그램 <호랑이 시리즈 완성하기> ****

호랑이를주제로달력,가방,시계등을만들어보는

수업으로,만드는소품에관한역사공부도함께이

루어질예정이다.수업은1~6월까지매월둘째주

토요일오전에있으며,수원박물관홈페이지에서각

회차별로예약을받으며,재료비는5000원이다.

1월9일~6월12일|수원박물관

문의031-228-4135|museum.suwon.ne.kr

<보물찾기 대탐험-보물 지도 만들기> *****

지도읽는법을배워우리의섬,바다,영토를이해하

는교육프로그램이다.어린이들이지도를쉽고재미

있게이해할수있도록전시관학습과체험실습을

병행한다.가족들과함께보물을찾으며즐거운추

억을만들어볼수있다.박물관홈페이지에서선착

순으로접수를받으며참가비는1만원이다.

2009년12월28일~2010년2월26일|경희대혜정박물관

문의031-201-2013|oldmaps.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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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남·

김주완·

김영필·

이규회·

김동현·

김범석·

권방현

극작ᆞ연출

박근형

문 의 031)828-5841~2 Ⅰ 인터파크 1544-1555

2010. 2. 5(금) ~ 2. 6(토) 의정부예술의전당 소극장금 오전 11시, 오후 7시 30분 / 토 오후 5시

※ 의정부예술의전당 홈페이지 예매시 수수료가 면제됩니다.

2009 창작 팩토리 사업 우수작품 재공연 지원사업한국연극 평론가 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3’

관 람 료 전석 2만원 (14세 이상 관람)

주 최 (재)의정부예술의전당, 극단 골목길 주 관 전국문예회관연합회 후 원 문화체육관광부

31 1 2 3 4 · 입춘

<테너 임웅균과 함께하는

영화음악회>

경기도문화의전당

02-780-5054

5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

2월5일~6일

의정부예술의전당

031-828-5841

6

경 기 문 화 소 식

2010 | 01 January 02 February

70 2009 no.07 71

SUN MON TUE WED THU FRI SAT MON TUE WED THU FRI SAT

27

<Vintage 캐릭터 장난감 전시회

Nostalgia for Characters>

~2010년2월1일

헤이리한립토이뮤지엄

031-957-8470

<허브아일랜드 불빛축제>

~2010년2월28일

포천시허브아일랜드

031-535-6490

28

<오색별빛정원전>

~2010년2월28일

아침고요수목원

1544-6703

<보물찾기 대탐험_

보물지도 만들기>

~2010년2월26일

혜정박물관

031-201-2013

29

<기획전시-벽사와 기복>

~2010년3월26일

대진대학교박물관

031-539-2383

<미피의 미술관에 가요!>

~2010년2월21일

성남아트센터

031-783-8000

30

<한반도의 공룡 탐험전>

~2010년2월21일

고양킨텍스

02-1688-3693

기획전 <놀이와 예술은 친구>

~2010년2월28일

장흥아트파크

031-877-0500

31

<동계방학 박물관역사문화교실>

~2010년2월26일

혜정박물관

031-201-2013

1 · 신정

<포천 백운계곡 동장군축제>

1월1일~31일

포천시백운계곡국민관광단지

031-535-7242

2

7 8 9 10 11 12 133 4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도자천자문>

~2010년1월20일

경기도자박물관

031-799-1516

5 · 소한 6

<세바스치앙 살가두 ‘AFRICA’ 전>

고양아람누리

031-960-0180

<겨울 어린이 도예아카데미>

장흥아트파크

031-877-1723

7

<이상남 벽화 개막>

경기도미술관

031-481-7000

8

<테마가 있는 예술사진展

“예술가들의 기록”>

1월8일~31일

안양예술공원내알바로시자홀

031-389-5391

9

<자라섬 씽씽겨울바람축제>

1월9일~31일

가평천일대및자라섬

031-581-2813

체험프로그램

<호랑이시리즈 완성하기>

1월9일~6월12일

수원박물관

031-228-4135

14 · 설날 15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성남시민회관

031-783-8000

16 17 18

<남궁옥분-사랑사랑누가말했나>

하남문화예술회관

031-790-7979

19 · 우수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 내한공연>

고양아람누리

1577-7766

<어린이연극 내방왕국 대모험>

2월19일~21일

의정부예술의전당

031-828-5841

20

<피아니스트 임동혁 리사이틀>

고양아람누리

1577-5266

10

뮤지컬 <시카고>

1월10일~2월28일

성남아트센터

031-783-8000

11 12 13 14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1월14일~17일

고양아람누리

1577-7766

<교과서와 함께하는 박물관 여행-

우리는 고고학자Ⅱ>

1월14일~2월6일

평촌아트홀내안양역사관

031-389-5364

15 16

<KBS교향악단과 함께하는

2010 신년음악회>

안산문화예술의전당

031-481-4000

<정명훈과 함께하는

2010년 신년음악회>

의정부예술의전당

031-828-5841

17

<빈 소년 합창단 새해희망콘서트>

성남시민회관

031-783-8000

<드로잉 쇼>

하남문화예술회관

031-790-7979

18

<제10기 교원 문화연수>

1월18일~22일

경기도박물관

031-288-5386

19 20 · 대한 21 22

뮤지컬 <컨택트>

1월22일~31일

고양아람누리

1577-7766

23

<이무치치 내한공연>

이천아트홀

031-644-2100

<겨울방학 특별 교육프로그램>

1월9/16/23일

영은미술관

031-761-0137

28

<임진강민속축제>

파주임진각평화누리

031-941-2425

1 2 3 4 5 624 25 26 27 28

<신소장품전>

1월28일~3월1일

경기도미술관

031-481-7000

29 30

가족뮤지컬 <아기공룡 둘리>

1월30일~31일

경기도문화의전당

080-080-1280

◉<경기문화나루>는경기도내도서관,문화기관,농협등에서독자여러분을만나고있습니다.독자와함께나누고싶은소식이있으면[email protected]로보내주세요.

21 22 23 24

<존 오코너 초청 리사이틀>

경기도문화의전당

031-230-3440

25 26 27

도자천자문

맨오브라만차 정명훈

컨택트

신소장품전테마가있는예술사진전

놀이와예술은친구

바바라보니

너무놀라지마라

남궁옥분

보물찾기대탐험_보물지도만들기

내방왕국대모험

72 2010 no.08 73

편 집위원 칼 럼

분야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지만, 소장품과 전시를 위한 연구, 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하고 실현하는 일이 미술관 학

예연구사의 주 업무다. 그리고 소소한 듯 보여도 의외로 제법 시간

을 들이는 일이 있으니, 바로 손님맞이다. 미술관을 방문하는 관람

객 한 분 한 분 모두 소중한 손님이지만, 특별히 국내외 타 기관의

관계자들에게 미술관을 알리고 전시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소

개하는 것은 귀한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립미술관이 그 역할에 충

실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좋은 기회다. 지역 미술관의 명성

이 높아지면 지역사회 주민들의 자긍심도 커지기 때문이다.

지난 금요일에는 유난히 많은 손님이 미술관을 찾았다. 백남

준아트센터의 큐레이토리얼 워크숍 참가를 위해 방문한 영국 작

가 세 명을 시작으로 주한 호주대사관의 문화담당관이 호주에 있

는 몇 개의 문화예술기관 담당자들을 대동해 방문했다. 아시아 지

역의 문화예술 교류와 지원을 담당하는 아시아링크Asialink의

시각예술 프로그램 담당자, 멜버른에 있는 미디어센터인 ACMI

Ausrtalian Centre for the Moving Image의 수석 큐레이터를 비롯,

실험적인 예술을 선보이는 아트센터인 멜버른의 익스페러멘터

Experimenta 관장과 퍼스 문화센터Perth Cultural Centre의 관장까

지 모두 여섯 명으로 구성된 방문단이었다. 오후에는 후쿠오카 아

시아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가 연락도 없이 방문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미술관을 둘러보는 방식이다. 미술관의

기본적인 성격과 내용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지만, 무엇을 목표

로 하고 왔는지에 따라 관람 동선도, 방법도, 시간도 제각각이다.

온갖 실험적인 요소들을 찾아다니는 작가들은 공식적인 토론회

시간에도 미술관 여기저기를 거닐며 뭔가 흥미로운 것을 만나기

위해 눈을 반짝였다. 오후 비행기를 예약해놓고 선감도의 경기창

작센터까지 방문 일정을 잡아둔 호주 방문단은 빠른 걸음으로 미

술관의 기본적인 동선, 건축 구조, 주요 소장품의 설치 방식과 주

전시실의 형태와 설비 등을 살피면서, 미술관 시스템을 이루는 물

리적 조건들을 확인하며 사

진을 찍는 일에 주안점을 두

었다.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의 구로다 학예실장은 간단히 인사

를 나눈 후에 학예연구사들의 관람 안내를 정중히 사양하며 현재

진행 중인 기획 전시를 관람하는 데만 꼬박 두 시간을 할애했다.

미술관을 경험하는 방식에 정해진 매뉴얼은 없다. 관심 있는

기획전을 보고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것은 물론 최첨단 건축

의 경연장이 되고 있는 미술관의 새로운 건축적 요소를 살피는 것,

혹은 그저 일상을 벗어난 시공간의 기운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각자의 방식대로 원하는 바에 따라 그곳을 이용하

면 되는 것이다. 주말에 필자의 집을 방문한 친구 내외와 아이들을

데리고 백남준아트센터에 갔을 때, 우리가 그곳에서 한 일이란 카

페테리아에서 아이들에게 핫초코 한 잔을 마시게 한 것뿐이었다.

아이들이 보채는 통에 전시 관람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 분명 백남준아트센터에 갔고, 로비에 있는 <TV 물고

기>를 만났으며, 친구 내외는 여간해서는 방문할 기회가 없을 그곳

을, 그래도 한 번 다녀갔다는 경험을 안고 돌아간 것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경기도미술관은 호수공원 한가운데 있어, 산

책 중에 그저 화장실을 이용하러 들어오거나 잠시 쉬어가는 방문

객도 있다. 사실 우리 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의자는 건축가 조민석

의 작품이고, 주전시실 출입구 쪽 1층 화장실에는 한동안 신미경

작가의 비누로 만든 조각 작품을 일반 비누처럼 사용하도록 설치

해놓았다. 미술의 가장 큰 목표 중의 하나는 생활에 다다르는 일이

다. 하루하루 사는 일이 바로 예술일 뿐이라는 것, 치열한 그 삶 속

에 진실과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

러니 미술관서 무얼 할지, 걱정 말고 주저 말고 오시기를 당부한다.

이러나저러나 모두 반가운 손님이다.

글황록주_경기도미술관학예팀

조민석 | 로봇타워 | 280x120cm | 2008 | 화이버 강화 프라스틱 | 경기도미술관 소장

생각보다 쓸모가 많은 미술관 탐구생활